송두율교수의 징역7년 판결은 시대착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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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우(lotrec78)등록 2004.04.04 15:50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인 대통령탄핵과 총선정국이 정신없이 진행되는 와중에 경계인을 자처하는 송두율교수가 30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여론의 도마위에 놓이면서 일부언론에 의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서열23위"로 낙인찍힌 그대로 그의 혐의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자체가 오래전부터 위헌시비에 휘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준하는 판결은 법적인 논리와는 별개로 정당성과 타당성이 크게 의심받고 있다. 아직은 시민불복종개념이 사회인식체계 안에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근본이 법치주의라는 케케묵은 논리에서 반론을 펼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기득권의 논리가 균열을 보이고 있는 지금, 북한을 더이상 주적개념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햇볕정책"에 대한 색깔론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사회주의 이념이 공론의 장에서 소통될 수 있는 시대의 변곡점에서 과연 송두율은 경계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일까? 적어도 오만한 국가보안법 논리보다 그를 옹호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이유가 우리의 의식속에 무수히 산적해 있다고 믿는 것이 과연 나의 시대에 대한 착각인지 확인해 보고자 한다.

"송두율은 고도의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대남간첩인가?, 자신이 줄곧 내세우는 경계인적 정체성은 좌편향적 회색주의에 다름 아닌 것일까?, 그의 일련의 저술활동은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현학적 써커스를 통해 북한체제를 정당화하는 은밀한 용비어천가일까?"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한 질문이 기껏해야 국가보안법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법이라는 것은 체계가 방대할뿐 근본적으로 건전한 민주적 시민의 상식에 따라 명료하게 판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법리로 왈가왈부하는 것이 시민의 상식과 역행할때 그 법은 법으로서의 정당성을 잃는다는 뜻이다. 물론 남한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현실주의자"로서의 생활감각은 이와같은 판단에 있어 필수조건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은 어떤가. 여적히 극우보수세력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환상에 집단적 무의식으로 동조하는 공안정국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또한 냉전논리는 이미 유통기한이 1990년대 초에 세계적으로 경과했다.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그나라가 사회주의 국가여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대국으로 동아시아를 지배할 것에 대한 근심으로 비롯된다. 이와같은 국내외적 상황 하에서 송두율교수는 전적으로 상징적인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남북경협, 민간부문의 교류, 이산가족찾기, 금강산 관광으로 적화통일의 야욕에 사로잡힌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국력의 비교만으로도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또한 남한은 미국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중재하며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정부는 더이상 "때려잡자 공산당"식으로 외교정책을 구사하고 있지 않다. 거의 사회의 전 분야에서 북의 존재를 함께 번영해야 할 존재로 인식하며 적극적 교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럴경우 국가보안법 3조 1항 "반국가 단체에 가입,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자를 무기,사형 또는 징역 5년이상에 처한다"에 의거해 이 모두를 위법이라 규정지어야 하지 않을까. 송두율교수에 대해서 그토록 악의적으로 해석한 이념적 잣대와 국가보안법이라는 자의적 법률로 그들 모두를 잡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법적 형평의 논리에 어긋난다. 교도소규모가 1인 독방에 더 안성맞춤이기 때문에 전 사회영역을 기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법은 곧 정의이고 시대정신이라고 주저없이 성토하던 그 열렬한 기백으로 왜 덩어리와 부피의 차이밖에 없는 사회에 유권해석을 하지 않는가. 적어도 옳고 그름만이라도 가려주어야 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참고로 악법이 법일 수는 없다.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강요받지 않을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선 이것이 진리다.

송두율 교수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법의 문외한으로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것이 나의 무식의 소치인지 아니면 송두율의 학자적 양심을 고까운듯 바라보며 그 신념을 오만함으로 해석하는 법적용의 유치함인지 가려보자. 먼저 그의 이적행위가 과연 실체가 있어서 그것의 남한사회에 끼친 현상적 해악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그의 단순한 노동당 가입 전력이 문제가 된다면 모든 탈북자 혹은 황장엽을 비롯한 북한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귀순 또한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여론홍보용으로 내세운 다음에는 가차없이 1인독방에 가둬야 그들의 확인할 수 없는 진정성을 완전히 밀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송두율교수처럼 "내재적 접근법"을 통해 교묘하고 은밀하게 대남책동을 하는 것보다 일반 귀순자들의 덜 세련된 글쓰기는 그 파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책은 읽기가 어렵고 그 의미자체를 보통 사람들이 분별해내기가 까다로운 반면 고백형 글쓰기나 사회적응기는 직접적으로 북의 현실을 유포시켜 독자들을 현혹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법치주의에 큰 오점을 남기는 것인데 과연 한가롭게 좌시할 수 있는 것인가. 어째서 사회 일각으로부터 레드컴플렉스라고 불려지는 적극적인 세력들이 이토록 근면성실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 통탄을 금 할 수 없다. 이래서야 정작 누가 대한민국의 안위를 챙겨준단 말이가. 만약 이것이 유치할정도로 역설적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과 똑같은 인식적 잣대로 송두율교수를 바라보기 바란다. 과연 그의 혐의는 실체가 있는 것인가. 그로 인해서 사회적 혼란, 국론 분열, 선전 선동에 휩싸인 대중의 난동이라도 있었던가. 단 하나라도 그의 저작의 이적성으로 인해 실제적인 국가적 해악이 발생했는가. 오히려 경직된 한국적 대북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학자의 연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친북적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평양냉면을 좋아하고 북한 응원단에 환호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 또한 나 스스로는 친북적인 태도라 명명할 수 있는데 이것은 위법이 아닌지 모르겠다.

송두율교수가 더이상 정체와 실체조차도 알 수 없는 반공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된다. 침묵하는 다수의 성향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탄핵정국의 역사적의미와 송두율교수의 문제는 그 역사적 궤를 같이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준법서약서를 들이대며 그동안의 있지도 않은 죄과를 인정하라는 것과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아서 탄핵이 되었다는 주장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반드시 우리가 수고를 들여 제대로 평가하고 넘어갈 문제이다. 적어도 냄비근성이라는 조롱과 야유를 극복할 정도의 지속적인 사회적 관심이 담보될때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표출될때 사회는 진화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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