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의 드라마는 좀 불편하다

모두가 좋다고 말하지만 나는 싫다고 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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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순(yoana)등록 2004.04.05 19:29
김수현, 송지나, 노희경.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아마도 스타작가라는 점일 것이다.
김수현이야 한국 드라마계의 거장이니 말할 필요도 없고 송지나 역시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가이므로 특별히 드라마혐오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노희경도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휴먼멜로드라마를 완성해나가고 있는 작가이니만큼 그녀를 모르는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노희경의 작품들을 거의 다 봐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그녀가 스타작가의반열에 오르기 전인 그녀의 초기작 <내가 사는 이유>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녀의 적지 않은 작품들 중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을 각색한
<바보같은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생각하는데 이유는
가진 것이라곤 몸과 마음밖에 없는 가난한 변방의 남녀를 순수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과 그 사랑이야기가 어떤 작위적인 서사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캐릭터들의 대사- '한방' 역의 한진희와 미싱 돌리는 늙은 아줌마 김지영 등의 맛깔스런 대사들-와 상황 설정은 노희경 특유의 서정적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노희경의 작업들 속에서 작가의 매너리즘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계속되는 작업에는 과거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다시 등장하고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대사와 제스처들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그녀의 드라마에는 늘 주인공 옆에
그(녀)를 두둔하고 옹호하는 주변인물이 배치되어 있고, 또 그녀가 집요하게 써먹는 캐릭터 중 하나인 '창녀'가 곧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가을동화>와 <여름향기>로 유명한 윤석호 피디가 생각 있는(?)
시청자들한테 욕을 얻어먹은 이유는 딴 게 아니라
그가, 개성있어야 할 조연들을 주연들의 장식품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노희경 역시 종종 이런 윤석호 식의 폐단을 위태위태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거짓말>에서의 성우의 선배 캐릭터, <고독>에서의 경민의 친구 캐릭터,
영우의 형 캐릭터가 주인공의 일거수 일투족을 시청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데에만 그 몫을 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물론 윤석호가 그랬던 것처럼 노희경이 의도적으로 조연들을 소모품으로 이용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이 그런 혐의는 있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또한 노희경은 유난히도 '창녀'라는 캐릭터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를 들어
이영애와 손창민이 주연을 맡았던 <내가 사는 이유>와 박선영, 지성 주연의 <화려한 시절>, 배종옥과 정웅인이 주연을 맡았던 sbs 단막극 <빗물처럼> 에서는
창녀가 그 주인공이었다.
또한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애착을
보이는데 <내가 사는 이유>의 나문희, <꽃보다 아름다워>의 김영옥이 그들이다.
나는 물론 이 대목들에서 노희경 특유의 휴머니즘을 엿볼 수 있다.
제도권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인간 군상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어루만져주기까지 하는 노희경표 인문주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 비판적으로 보자면
그녀의 매너리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게으른 상상력의 결과물 같은 거 말이다.
<꽃보다 아름다워>의 김영옥을 보면 왜 자꾸 <내가 사는 이유>의 나문희가
떠오르는지......
비단 나만의 딴지일까.

나는 솔직히 노희경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바보같은 사랑> 때부터인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드라마가 초지일관 관철시켜온 "선한 인간만 있고 악한 인간은
없다"라는 공식 앞에서 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도 있다.
그녀의 드라마에는 말 그대로 악한 인간은 한 명도 없다. 그야말로 착한 인간들만
나오는 착한 드라마이다.
마치 훌륭한 자질과 좋은 심성만을 도드라지게 부각시켜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실질적인 훈육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위인전을 읽고 난 후의 느낌처럼
노희경의 드라마를 보고 나면 선한 인간으로 개종당하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물론 내가 이상한 인간일 수도 있다. 노희경의 선의를 교묘하게 곡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드라마가 주는 예기치 않은 불편함이 나를 당혹케 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인가?
어쨌든 나는 완전한 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착한 인간이 있으면 나쁜 인간도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이분법적인
사고인가? 아니면 제대로 된 현실주의적인 사고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는 지나치게 트렌드 드라마에 익숙해져 있는 나머지
노희경식 드라마를 몰라보는 것인가?
다시 말해 선악구도가 너무나 분명해서 도리어 짜증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트렌드 드라마에 나는 종속된 나머지 잔잔하고 서민적인 노희경의 드라마를
체질적으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트렌드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혐오하기 때문이다. 물량공세만으로 시청률을 올리려는, 그런 천박한 드라마는
누가 돈을 준대도 못 보는 성미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드라마를 무비판적으로 보는
성미도 못 된다.

나는 노희경의 선의를 믿는다. 그녀가 사회의 아웃사이드들에게 보내는
애정어린 추파를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악인에 대해서도 솔직한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악인을 인간적으로 그리는 것도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철저한 악인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그릴 수 없는
악질적인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들도 그렸으면 좋겠다. 악인이 왜
악인일 수밖에 없는지를 천착하는 근본주의는 어떤 면에서 철처한 기교이다.
나는 노희경이 기교를 좀 덜 부렸으면 좋겠다. 모두가 완전히 선한 인간이라면
세상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그런 세상을 믿지 않는 나같은 사람은 질식하지
않을까?

나는 김수현의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차라리 김수현의 드라마가
노희경의 드라마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김수현은 악한 인간을 제대로 그리기 때문이다.
선한 인간만이 다가 아니란 걸 노희경은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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