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총선의 추억

망국으로 가는 지역 감정, 이젠 없어 지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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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jirisani)등록 2004.04.08 17:20
6월 항쟁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른바 '6.29 선언'이 있던 그 해 1987년의 대선은 참으로 이 나라를 다양한 색깔로 물들인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녹색, 청색, 황색 등 노태우 후보가 이끄는 민정당에서 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의 색깔들이 시각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전국을 4분할하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4당4색으로 물들인 역사적 상처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음 해 13대 총선에서는 "끌어다 놓은 보릿자루도 국회의원이 된다"는 말들이 바로 이 시기에 인구에 회자했고 우리 의회의 비극이자 민족의 정치적 아픔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때, 1주일에 꼭 한번씩 영호남을 오가고 해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주말부부의 신세가 되어 평일은 영남에서 주말은 호남에서 생활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 시기의 추억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을 때 '김대중 선생 만세!!'를 외치지 않으면 안되더라"는 공갈, 협박은 한번도 호남을 못가 본 영남사람들 입에서 나왔고 그 말이 겁이 나서 나는 항상 영남 쪽에서 주유를 해야 했습니다. 어쩌다 경상도에서 주유를 못하고 광주에서 기름을 넣을라치면 '김대중 선생...'을 외쳐야 하는 공포심에 전율을 떨어야 했습니다. 유언비어의 희생물로 말입니다.

"영남에 전라도 차를 몰고 가면 차를 다 때려 부수더라" 또 "영남인이 똘똘 뭉쳐 호남을 죽이려고 하니 우리는 전라민국으로 독립을 해서 투쟁을 해야한다"는 말은 영남 쪽에는 가보지도 못했던 광주 쪽 택시기사의 말씀이었습니다. 경상도 특유의 억양을 바꾸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차에 내릴 때까지 입 한번 떼지 못하고 그 기사님의 처분에 주눅이 들어야만 했던 그 시절입니다.

고향이 전라도고 초.중.고.대학을 광주에서 나 온 어떤 분의 이야깁니다. 이 분은 그 때 경상도에서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새 차를 한 대 구입하고서는 광주에 계신 부모.형제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승용차를 소유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어서 아마도 이 분은 부모 형제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익히 아는 터라 광주 시내에 조심스레 진입을 하는데 아뿔싸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는 경적을 요란스레 울리고 라이트를 깜빡이는 등 경상도 차에 대한 행패가 이만 저만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공포심에 질려 문방구에서 큼지막한 종이를 한 장 사서는 "차는 경상도 찬데 운전자는 광주사람입니다"하고 뒷유리에 써 붙이니 그제서야 행패(?)를 그치더라는군요. 그 뒷날 아침, 부모형제를 만나고 전주의 형님댁 골목에 주차해 놓은 문제의 차를 내다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니 이 무슨 해괴한 광경입니까? "어떤 놈들이 내 차에다가 똥을 한 바가지 퍼부어 놨더라. 다시는 차를 가지고 전라도에 안갈것이다" 나는 이 분에게 반문 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뒤에서 깜박거리지 않습디까?, 주차는 제대로 하십니까?" 그 분은 왕초보 운전자임을 광주에서 만큼은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지역감정에 주눅이 들어서 말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 기억하고 있을것입니다. 전남의 피아골 입구에 4당의 선거벽보는 오로지 노란색밖에는 온전치 못하고 나머진 다 훼손되어 없던것을요. 그러나 경남의 화개장터에 오면 그런일은 없습니다. 이 말 자체가 아직은 조심스럽고 또 지역감정을 호도하는 발언인것 같아서 한편으론 저어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전북의 인월과 경남 함양의 선거벽보도 위와 같이 거의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전남 광양군 진상면과 섬진강 건너 경남 하동의 벽보 또한 마찬가지였지요.

17대 총선, 이제 일주일이 남았습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유권자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남다른 감회를 갖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정치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고 새로운 역사의 서막이 될 것같은 그런 특별한 감회를 말입니다. 내 동네 출신의 총수가 끌어다 놓은 보릿자루만 선거벽보에 남아 있고 나머진 몽땅 훼손되는 그런 사례는 전혀 볼 수 없다는게 우선은 좋고 전라도가 어떻고 경상도가 어떻고 하는 그런 말들이 많이 없어진 것이 또한 좋습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 출신이 출마하고 그 반대로 전라도에서 경상도 출신의 국회의원후보가 나온다 해도 이젠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무엇보다도 더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초는 아주 특별한 민초임을 압니다. 과거 임진왜란 때 임금과 그의 추종자들은 왜군들을 피해 백척간두의 나라를 버린 채 압록강까지 도망을 갔습니다만 우리네 민초들은 각처에서 나라를 지키는 의병이 되어 국난을 승리로 이끌수 있었습니다. 구한말에도 내노라는 지도자들이 앞을 다투어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민초들은 어떠했습니까? 남녀노소 전국 방방곡곡에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총칼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훌륭한 민족이 아니었습니까?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은 19번 국도상에 위치해 있고 또 인접해 있습니다.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서로 공유하면서. 지금도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자동차 운전학원의 사례로 이 글을 맺겠습니다. 학원생을 실어나르는 차량이 각기 한 대씩 있는데 하동차가 구례로 갈 때 하동사람들이 다니는 구례의 운전학원에 태우고 갑니다. 또 구례차가 마찬가지로 구례사람들이 다니는 하동의 운전학원에 그들을 태우고 하동의 운전학원에 내려주고 갑니다. 이런 훌륭한 민초들을 어찌 저 위정자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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