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장에게 불려간 아버지

5월1일 아버지의 날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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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근(ldk56)등록 2004.04.30 19:04
우리네 아버지들을 흔히 그랬듯이 나의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술을 배웠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해야할 일은 많은데 별다른 요기거리도 없고 또 어른들끼리 모이면 별반 할 일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아버지의 술주정으로 인해서 흘린 수많은 어머니들의 눈물은 내가 되고 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술때문에 빚어진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은 누구나 떠올릴 법한 것이어서 여기서는 정말 아버지께 미안했던 일을 쓰고자 한다.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는 각 학년마다 한 학급뿐인 정말 조그만 학교였다. 당시 2학년이었던 나는 반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와 사뭇 다른 분위기의 아이가 전학을 왔는데, 오자마자 반장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상고머리에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나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은 까까머리에 책보자기를 둘러메고 깜장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말이다. 그 놈은 거기에다 얼굴도 히멀건하게 잘 생긴 편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면장아들이니 잘 대해 주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속으로부터 솟구치는 부아를 참을 수 없어 결국 하교길에 그 놈을 두들겨패주고 말았다. 싸움은 내가 그 놈보다 몇 수 위여서 일방적으로 두들겨팼다. 이유는 우리보다 잘 차려입고, 잘 생기고, 건방지다는 거 이외는 없었다.

사실 반장자리를 이유없이 찬탈당했다는 생각보다는 '없이 자라는 놈'으로서의 서러움이 폭발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던 그러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기도 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면장집으로 호출을 당한 것이다. 조그만 마을에서 면장은 정말 높은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더더구나 큰일이 난 것이다.

나도 덩달아 불려가서 아버지와 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면장은 애를 어떻게 교육을 시켰길래 이유도 없이 이렇게 두들겨팰 수 있는 거냐고 노발대발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금방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해서 소리를 질러댔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교육시켰냐'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댔지만 그 당시의 아버지들은 자식교육이랄 게 애초에 없었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빽 소리지르거나 밥상을 뒤집어 내팽개치면 어머니를 위시하여 온 집안이 어쩔 줄 몰라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걸 교육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공부 잘해라, 어른들 말씀 잘들어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등등 그런 얘기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속한다.

그러나 그때 어린 마음이지만 '아! 아버지가 나 땜에 야단 맞는구나!'라는 생각에 엄청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무어라고 용서를 빌까라고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집에 가면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야단치지 않았다. 잘했다고도 안했지만, 왜 그랬냐고도 묻지 않았다. 나는 도리어 그게 겁났다.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얼차례를 받고나면 차라리 편하게 잠잘 수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끝내 아버지는 그 사건에 대해서 내게 야단을 치지 않았다. 당시에는 불호령을 피하고 맞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아버지 마음 속에도 나와 같은 서러움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면장이면 면장이지! 지가 뭔데!'라는 반발심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버지는 54세에 갑자기 뇌경색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용서도 빌고 싶고, 매를 맞고 싶고, 야단 맞고 싶어도 그 아버지는 이제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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