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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사랑. 그렇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그것도 한가지의 사랑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두 가지의 사랑이 교차하기에 더욱 애절한 영화이다. 또한 이 사랑은 끝없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마틴 켐벨 감독이나 영화제작자의 의도대로 상상하기도 힘든 비참한 고난과, 그들에 의해 연결된 사람들 사이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 서로 교차하면서 영화의 비극미를 높이고 있다. 그렇다 그들의 사랑은 멀고도 멀다.
약간 비판적으로 보자면 제작자들은 영화의 골격을 로맨스 장르로 꾸몄다. 각 영화사이트가 이 영화를 로맨스, 액션 등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자식과 남편이 있는 여인의 다른 남자에 대한 사랑을, 그 남자가 처절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위해 몸을 던져 행하는 극진한 사랑으로 덮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결국 영화는 위기에 처한 남자(닉 칼라한 - 클라이브 오웬)의 소식을 듣고 여인(사라 조르단 - 안젤리나 졸리)이 먼 곳으로 달려가서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로맨스가 없었으면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이 영화에 로맨스가 삽입된 이유는 당연하다. 로맨스는 관객을 모으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로맨스가 없었더라면 하는 바램을 가지는 것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놀라운 소재들과 그것들의 짜임새가 가지는 힘 때문이다. 처음부터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고난 받는 이들의 아픈 삶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극한적인 상황으로 변화되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극한적인 상황을 너무 많이 보아온 우리들도 이 영화가 전하는 소재에는 신선함과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잊혀져왔거나 혹은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던 사람들의 고난을, 잔혹한 방법이 아니면서도 너무나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극한적인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고통이 정말로 저런 것 일거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들과 함께 하는 헌신적인 의사마저도 가망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호활동이란 것이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려니’라는 통념을 깨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슬픈 감상만으로 생각하기에는 그 실상이 너무나 잔인하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감동을 주기 위한 작위성이 없이도 이 영화는 놀라움과 함께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픈 감동을 주는 훌륭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디오피아의 난민캠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빈곤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영상들을 충분히 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실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함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그래. 정말 저랬을 것이야.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던 모습이 사실은 저런 것이었을 것이야.’ 내 머리에는 그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저런 당연한 모습을 상상조차하지도 못했을 것일까?’
이디오피아가 공산치하로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나마 늘 부족하기만 하던 구호물자는 끊어지고,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걱정한다. “이제 며칠 밖에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어떡하지?”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잖아. 내일이면 또 무슨 방도가 생기겠지.” 내 정확하지 못한 기억에는 그런 대사들이 그들 사이에 오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 기막힌 것은 뜻밖에 그곳에 시찰을 나온 정부관리의 태도이다. 그는 단지 시찰을 나왔다는 것 외에는 자신의 국민들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구호활동을 허락하기 위해 뇌물을 요구하는 눈치이다. 또 반군들은 실어오는 구호물자를 막고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아픔은 큰데 곳곳에서 그들을 짓밟는 무자비함이 존재한다.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장소를 옮겨서 이어지는 캄보디아에서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크메르 루즈 점령하의 난민촌으로 구호물자를 옮겨가기 위해서는 그들과 대치중인 베트남군의 점령지를 지나야만 한다. 베트남군 점령지에 구호물자를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베트남군에게 거액의 돈을 주어야만 한다. UN 마크를 단 구호물자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여기에서 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자를 받아들이는 크메르 루즈 또한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들이 베트남군과 싸우기 위해 필요로 하는 무기와 비밀정보자료들을 구호장비 속에 넣어서 운송해 주어야만 구호활동을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치하에 있는 사람들을 구호하기 위한 물자인데도, 그들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총을 들이대고 무차별로 사람을 죽인다.
베트남군의 검문에 발각되어 크메르 루즈의 몫인 무기와 비밀정보를 빼앗긴 닉 칼라한은, 베트남군으로부터는 크메르 루즈의 스파이로 오인 받고 크메르 루즈로부터는 베트남군의 스파이로 오인 받는다. 이것이 바로 구호활동에 대한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감상적인 생각을 깨는 이 영화에 담겨져 있는 현실이었다. 실제로 캄보디아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아니면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인지 나는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래! 정말 저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되풀이 하며, 그때까지의 나의 무지와 감상적이었던 인식을 부수어 가고 있었다.
다음 장면은 러시아와 처절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체첸이다. 여기에선 의사 닉 칼라한은 정말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구호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러시아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이제 단순한 통행세를 내는 차원을 넘어서 구호활동을 위해 정말로 스파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체첸 반군은 그들의 체첸난민을 구호하기 위해, 체첸반군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의사를 스파이로 취급한다. 처음부터 영화를 보아온 우리가 아닌 체첸인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인식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구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파이가 된 것일까, 스파이 활동을 하기 위해 구호활동을 가장한 것일까. 극한 대립이 있는 곳에서는 극한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극한의 상황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상황윤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놓인 상황이 그렇게 극한적이지 않음을 감사하면서 이 영화에 나타난 상황들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영화 속의 체첸의 상황보다는 캄보디아의 상황이 났고, 캄보디아의 상황보다는 이디오피아의 상황이 나았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의 처음에 보였던 이디오피아의 그 처참한 상황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이 세상에는 그보다도 더 극한적인 상황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이 영화에 대해 감사를 한다. 그리고 이디오피아의 상황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내가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를 한다. 그러나 그런 극한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감히 질문하기도 두려운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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