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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그 푸르렀던 젊은 시절. 나와 그 시절을 그저 만끽하고만 살만큼 단순하지는 못했다. 나와 당시에 친하던 한 친구는 틈틈이 함께 모여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미한 기대를 당시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불안감과 견주어 보곤 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현실이란 것으로 바뀌어 가는 미래라는 이름의 것이, 당시 고등학생의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에도 마냥 희망적이기만 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한없이 푸르게만 지낼 수 있었던 시절을 고민으로 가득히 채우며 보냈었다. 당시의 지식과 경험으론 아직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 연약한 머리로 우리들은 감히 세상을 알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조금씩 알게 되어가는 세상의 모양들을 우리가 꿈꾸고 있던 미래의 모습과 비교해보곤 했었다. 참 바보 같은 일이었었다. 단지 그날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미래를 현실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푸른 청춘을 그렇게 어리숙한 고뇌에 묻혀서 흘려보내어 버렸었다.
때론 희망에 부풀어서 온갖 백일몽을 꿈꾸어 보기도 했었다. 때로는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절망에 빠져서 시무룩하게 보낼 때도 있었다. 한갓 고등학생이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때부터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고민들을 마치 홀로 감당해야 하듯이 품에 않고 살아왔었다. 성경의 한 구절에 ‘우리가 모르는 신을 위한 신전’이란 것이 있다고 했듯이, 우리는 그때까지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던 고민거리들이 혹 장래에 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곤 했었다.
그 시절 나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는 고아였었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난후 그 친구는 형에게 얹혀서 살고 있었다. 당시 벌이가 꽤 괜찮았던 외항선을 타던 형이 바다로 떠나고 나면, 친구는 형수와 단둘이 빈 집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친구에게 형 없는 집이 자신의 집처럼 편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그 친구를 교회에다 전도해 놓고 용기를 주려 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걱정들로 이어지곤 했었다.
“정 안되면 막노동이라도 하지 뭐.” 세상살이에 대해 풀어나가던 이야기가 막히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당시에도 세상에는 전쟁과, 가난과 슬픔에 관한 소문들이 오늘날처럼 가득히 퍼져있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다른 친구들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그런 문제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무리 걱정을 해보아도 세상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하던 우리가 그런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막연히 대화를 하다가 미래가 막막하고 암울해지면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서로의 용기를 돋우곤 했었다.
어느 날 친구가 힘없는 얼굴로 나를 찾았다. 형이 바다에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번 떠나면 대개 일년이 넘는 바다생활에서 돌아온 형을 보고 온 친구의 얼굴은 기쁨대신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몇 번인가 바다생활을 해 본 그의 형은 집에 오자마자 굳은 얼굴로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는 바다로 가지 않겠다.” 그러나 집에는 모인 재산이 없었다. 형수가 꼬박꼬박 송금해오는 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요즘에야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졌지만 당시 원양어업은 베트남 용병수출과 주한 미군관련 서비스 산업과 함께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달러벌이 수단이었었다. 그러나 그 찬란한 한국원양어업의 이면에는 가혹한 폭력과, 차마 상상하기 힘든 끔찍하게 고된 생활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그 낭만적인 마도로스가 아니라, 바다위에선 아무도 모르는 또 하나의 조그만 전쟁이 치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는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책들을 읽은 이제야 비로소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친구는 바다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형의 굳는 표정에서, 희미하게 그런 사정들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가 그렇게 힘이 빠져 있었던 것 같았다. “노가다라도 하겠다.” 형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춘을 바다에서 바친 형에게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할 능력은 물론, 공사장에서 필요한 기술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끔찍한 바다로 나가지 않기 위해 친구의 형은 공사장에 나가서 막일을 했었다. 며칠간 막노동을 하고 힘없이 돌아온 형은 마침내 슬픈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 공사일은 정말 못하겠다.”
그 후로부터 우리들의 입에서 “정 안되면 막노동이라도 하지 뭐”라는 말은 사라져버렸다. 부모를 여윈 후 온 청춘을 바쳐서 버텨온 바다에서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그의 형이, 오랜 생각 끝에 비장한 결심으로 말했던 “노가다라도 하겠다.”란 선언이 단 며칠밖에 비참하게 허물어져 버린 것을 생각하면 역시 인생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정말 필요한 상황이 오면 노가다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정 ‘안 되면...’ 하는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삶에서 그것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에 뛰어들 생각이다. 그의 형처럼 금새 포기해 버릴지, 아니면 좀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을 강하게 키운다. 나와 같은 여린 심성을 가지지 않도록, 내보다 세상과 더 강하게 부딛 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그래서 인생이라는 바다를 보다 자유롭게 헤치고 다니며 온갖 보람된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나는 아직 어린 그들의 눈빛에서, 행동에서 어쩔 수 없이 피로 전해진 나의 모습을 본다. 벌써부터 그들의 심성은 충분히 여리고 충분히 감성적이다. 나는 거기에다 좀 더 강함을 심어주고 싶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이루어보지 못하고 접어야만 했던 많은 꿈들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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