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상용화 논의는 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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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우(lotrec78)등록 2004.05.06 14:13
영어 常용화론(共용화론)은 거론될 때마다 매번 여론의 혹독한 된서리를 맞는다. 단일민족적 자긍심과 고유언어인 한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일제시대의 창씨개명 및 언어말살정책의 고통이 융합되어서 감정적 피드백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2002년에는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발돋움시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국지적 영어공용화론이 등장했었다. 이번에는 서울시가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지와 세계일류도시의 기치를 내걸고 영어상용화를 모색하고 있다. 뜬금없는 행정적 계도차원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영어콤플렉스와 영어신드롬이 범벅된 현실이 주는 하중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표상되는 글로벌시대의 도래와 지구촌 생활권의 향유는 교통어로써 영어 사용의 편의성을 증대시키고 있다.

영어를 누구나가 반드시 꼭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국제경쟁력차원의 영어 상용의 필요성은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영어 상용화에 대해 유독 성토하는 듯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중의 한가지는 아마도 교과과정의 영어를 배워도 입 한 번 뻥긋하기 힘든 소통능력 부재의 어학공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한국적 상황의 모순이 있다. 수많은 외화를 어학연수에 쏟아붓고 있는 맹목적 영어공부 열기의 현실이 한켠에 존재하고 있는데, 영어 상용화론은 왜 번번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것인가. 또 다른 이유는 민족정체성과 언어의 관계가 일제시대 역사와 맞물린 탓에 국어에 대한 배타적인 독자성을 피상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리적 제한으로 인한 문화적 경계의 발생과 그로 인한 이질감이 끊임없는 분쟁을 야기시켰던 것이 역사의 한 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경계구분이 무의미한 시대가 되고 있다. 적어도 문화만큼에 있어서는 이동이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과 더불어 경제 교류는 국경을 초월하고 있다. 영어가 교통어로써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경위가 힘의 논리이자 자본의 논리였다고 비판하는 것은 별도로 치자. 무엇보다 직시해야 되는 것은 현재의 영어가 에스페란토어적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해외여행이나 비즈니스, 인터넷, 유학 등에서 영어는 자신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습득한다. 이것이 영어공부를 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다. 정작 자신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영어신드롬이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 집단무의식이라는 비판이 가능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더 나은 지위를 얻고자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명백한 판단이다. 사회구조가 생존영어를 강요한다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어습득의 어려움으로 인한 불만과 일종의 통념적 "자격 갖추기"에 안달하는 심사 때문에 과부하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독해와 문법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언어구사능력은 젬병인 것에 느끼는 부담감이 더욱 이런 반발심리를 부추기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과 필요없다는 사람의 뚜렷한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공부하기 싫은데 사회여건이 공부를 해야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괴롭다는 푸념이 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영어는 필요하기 때문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제도적인 상용화 노력이 전혀 생뚱맞은 행적적 창작이 아니라 도저한 수요욕구의 팽배에 상응해서 제시된 것이라는 합의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문화는 순수하게 고유한 형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경계의 넘나듬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아 왔다. 즉, 한 지역의 문화가 교체되고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문화와 만나면서 변용되고 융화되는 것이 문화의 속성인 것이다. 한글도 그렇다. 한자어의 혼용과 외래어의 틈입은 어떤 고유한 형질의 혼탁과 외부의 침범이 아니다. 물론 오남용의 사례로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훼손되는 지점도 있다. 그러나 언어체계가 바뀌고 문화식민지가 된다는 하염없는 기우는 언어의 상호교류와 상호연관성을 너무 도외시 하는 것이 아닌지 물을 수 밖에 없다. 절대적 언어 형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독자성에 한글이라는 언어의 위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한글이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언어보다 우월하거나 완성된 체계라고 가치판단의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편의성이나 표기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차별적 우열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일 민족이라는 허상에 언어를 끼워 맞춰 순수의 논리를 들이대는 순간 배타적 애국주의에 봉착할 여지는 늘상 있다.

언어사용은 세대와 시대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화해가기 마련이다. 한글창제시절의 한글을 곧이 곧대로 고수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영어가 상용화 된다고 해서 모국어로써의 한글의 지위가 격감되고 언어체계가 혼란될 것이라는 예측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언어는 박제된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해서 유럽의 어느 지역이 미국적이라고 할 만한 곳이 있는가. 물론 프랑스나 독일은 영어가 자국의 언어와 혼용되는 차원을 넘어 동화되는 형국에 경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체계가 유사한 유럽어권의 그런 대처가 언어체계가 상반되는 한국적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술구조와 발음, 그리고 억양이 틀린 한글과 영어의 지위쟁탈전이 모국어와 외국어의 층위를 과연 뛰어넘을 수 있을까. 물론 이것은 일제의 언어말살정책의 억압과 강제적 접근이 아님을 주지해야 한다.

인도식 영어, 중국식 영어, 일본식영어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한국은 특이하게도 콩글리쉬가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자조적 성격의 것으로 얼토당토한 영어사용을 흠잡는 말이다. 그토록 영어연수를 가는 이유중의 하나는 본토발음에 더 가까운 언어구사를 위해서이다. 자신의 어눌한 발음이 의사소통의 가능성 이전에 자격지심을 유발하기 때문에 더욱 맹목적으로 "빠다발음"에 연연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한국식영어의 가능성은 재고하지 않는가. 이차적으로 습득되는 언어는 대화와 소통에 가장 큰 목적이 있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에야 외국인들이 쓰는 일상어 수준의 언어구사력이나 발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맹랑한 발상이 아닌가. 한국식영어에 주눅들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외국에 가서 열등감을 느끼며 닮아가기에 안달하는 것보다 국내에서 상용화를 통해 어학의 개념에서 언어사용으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미군기지 기지촌사람들이 죄다 미국식으로 사고하고 영어를 모국어 이상으로 구사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것을 서울시 영어 상용화 계획과 직접대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식영어 구사를 더 이상 계면쩍어 하지 않게끔 하는 데에 상용화계획의 성과점이 있을 것이다. 소통적 지위로의 복귀가 무엇보다 영어에 대한 발전적 습득의 가장 큰 지향점이 아닐까 한다. 덧붙여 영어교과과정에서의 한계점은 상용화의 추진으로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제반의 인식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영어의 완벽구사에 대한 콤플렉스와 신드롬이 진정되리라 생각된다. 물론 그것과 병행해 한글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발전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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