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에 대한 제대로된 청사진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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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우(lotrec78)등록 2004.05.21 19:13
노동자 농민 서민을 대표하는 진보정당의 원내진출과 여대야소의 국면전환으로 그동안 정체되어 왔던 국가개혁 사안들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리당략의 정쟁과 정경유착의 부패사슬로 점철된 16대 국회의 사전 정치적 만료를 선고한 유권자들이 17대 국회의 황금분할을 이루어 냈다. 또한 헌재의 대통령 탄핵 기각 판결로 리더쉽 부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민생살리기의 전체적인 위용이 갖춰졌다. 야당의 소모적 반발과 견제로 인한 고의적 정국혼란에 대해 끌탕으로 넌더리를 쳐왔던 시민들로서는 한 껏 기대해볼 만한 상황이 마련됐다. 게다가 각 정당의 대표들이 너나 없이 "상생과 화해"의 기치아래 경제발전에 올인 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고 있는 것은 그간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의구심을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각 사안별로 구체적 접근방법과 지향점의 간극은 여전한데, 대통합의 이미지만을 판매하듯 살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기업과 노동계가 점접을 갖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문제의 해결도 그래서 그 추이를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정치권의 청사진 제시와는 별도로 "비정규직"문제는 노동계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풀어 가야하며, 무엇보다 시급히 재계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노동계의 격렬한 투쟁과 대응으로 충분히 공론화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지향점의 도출이 아직은 미흡한 것으로 보여진다. 노동착취라는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나오는데 이것이 평균임금과 기업의 "우리도 못살겠다"와 경제불안이라는 상황논리, 여론 생산자 및 소비자의 안이한 중산층적 시각이 맞물려 사태의 긴박함이 외려 축소되고 있다.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속에서 어느 누구도 맘편히 노동절을 만끽할 수 없다. 그리고 기본적 권리 행사를 위해 투표일에 쉬겠다고 당당히 얘기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회사차원의 시혜적 혜택의 일괄 부여 말고는 정규직과 비교해 부당한 처우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기목소리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경제불황의 현실속에서 재고용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회사에 목을 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낮은 임금과 대우 속에서도 서러운 처지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감당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위화감은 커다란 사회갈등 요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대해서도 조속히 재계의 자세전환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몇몇 노동조합에서도 그 한계가 드러나듯 노동자들 간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반목의 골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근로자)들 사이에서 상대적 박탈감과 처우에 따른 종속관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이러한 갈등상황을 "노동자 길들이기"차원, 즉 이이제이로써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된다.물론 모든 대기업 중 소기업을 총망라해서 이런 혐의의 형틀을 씌운다는 것은 비약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라는 노동고용 방식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이러한 갈등과 반목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기업의 노동유연성 논리와는 별개로 개개인의 직무에 대한 충실성과 직능 효율성, 노동에 대한 만족감과 성취감은 급감하고 있다. 이럴경우 일의 능률은 커녕 기본적인 직무 수행에 있어서 시너지효과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때 두드러지게 크다. 일부 비정규직의 경제력은 사회안정망이 부실한 현국가수준에서 거의 생존위험수위에까지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고용유연성에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있는 기업들은 비정규직이 현재 감수하고 있는 수위 정도의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정규직의 자리를 늘리는 차원의 노력이 회사 존폐의 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대기업들은 설비투자보다는 주식거래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고 , 끊임없이 정계로 유입되던 비자금, 그리고 부당내부거래등의 합벅적인 경영횡포가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경제회생에 전력투구하는 전문경영인상을 인정하라는 식의 얘기는 억지스럽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전 기업체가 그런 일부 비난받을 기업들의 복사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러나 자본의 집중과 흐름은 덜 가진자에 상당히 비정하다는 것이 누차 지적되어 온 것이다. 모든 경영인을 도둑놈이나 마르크스식 착취자로 보는 것이 아니다. 경영계는 비교우위의 권한을 갖고 있으며 충분히 절박한 "비정규직"문제에 대해 더 성의있는 태도와 관점을 견지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양산의 불가피성만을 강조하는 기업의 논리는 노동자를 대용 부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태도의 반증아닌가. 거시경제라든가 경영학차원에서 입력 산출논리로는 왜 노동자들이 끝끝내 거리로 나가 그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경제지표 최우선의 알량한 모토일뿐이다. 그것이 철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2만불시대의 염원이라는 상징이 개개인에세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하다. 한평생 핍진하게 노동을 해도 일천한 경제능력 대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는 사회적 빈부의 비율문제라고 마냥 치부할 수 만은 없다. 그리고 비정규직 양산은 청년실업의 증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느 누가 불안정한 지위에 차별 임금을 덥썩 선택하겠는가. 현재의 비정상적인 자격증 취득시대와 공무원 각광시대는 이런 문제의 거울이다. FLAT&SLIM형 기업구조조정은 더 적극적이고 네트워킹이 강한 노동구조를 통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단순히 저임금과 인원감축으로는 노동의 잠재역량을 끌어낼 수 없으며, 경제 성장 또한 요원한 얘기일 뿐이다.

덧붙여서 정규직들의 분배정의의 극적인 실천도 담보되야 하겠다. 편가름으로 인한 자기몫 챙기기에 연연해서는 문제해결의 또다른 주체로써 제역할을 할 수없다. 소소한 기득권유지를 자중하고 적극적 연대의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노동귀족"이라고 생떼 쓰듯 몰아붙이는 언론과 재계의 입장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정규직은 현실적으로 조직적 연대가 약하기 때문에 더 열악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정규직도 잠재적 비정규직임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중세부터 귀족의 습속은 자신과 계급이 다르고 클래스가 낮은 신분에 대해서는 냉소하고 외면하는 것이 본질이다. 얼토당토 않은 일부의 "노동귀족" 운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길은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노동자적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발휘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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