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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똥>이란 이름의 동화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우연한 기회에 그 글을 읽은 친구가 살며시 내 귀에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당시에는 그 동화가 그리 유명하지 않을 때였다. 왠지 나는 그 책을 사서 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친구가 전해준 그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듣고 많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원작을 읽지도 않은 채 나만의 새로운 강아지 똥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대학 초기까지도 그 내용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그 이야기에 대해 사색한 것을 가지고 대학 초기 내가 편집하던 교회 학생회 회지에 3회에 걸쳐서 연재하기도 했다. '강아지 똥'은 당시 내 사고에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친 충격적인 생각 거리였다.
그 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강아지 똥>은 참 유명해졌다. 서점에 가기 좋아하는 내가 서점에서 그 책을 마주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 서서도 금세 읽을 수 있는 그 짧은 이야기를 읽어보지는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내 집 거실에서 고급스레 제본된 <강아지 똥> 동화책을 발견했다. 아내가 좋은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주려고 그 책을 구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강아지 똥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우리 부부는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성장하면서 겪은 모든 사고의 편린을 공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내 마음을 읽은듯이 그 책을 집에다 들여놓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 책이 내 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가지고 얼마나 진지하게 삶에 대해서 고민을 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책은 삶이란 어떤 것이라는 지식을 주어서 깨달음을 얻게 한 것이 아니라 '똥'이라는 하찮은 물질의 존재론적인 고민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깊이 있게 성찰하게 해주는 매개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 책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느냐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강아지 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오랫동안 사색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나만의 강아지 똥을 쓰기도 한 것은 바로 당시에 내가 인생이란 것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떻게 움직여가고 있고, 그 세상에 속한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인간은 미물에 불과하고 내가 아무리 크게 소리를 쳐 보아도 내 소리는 세상의 수많은 소음들에 묻혀 사라져 버릴 뿐인데 나는 그런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그 의문을 강아지 똥을 명상하면서 풀어보려 하였던 것이다.
오늘 나는 행동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믿음이란 증거 하는 것이고, 자신이 받아들인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에 가득한 불의를 보면 한발이라도 더 그 불의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려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실상 내가 하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지만, 세상의 구석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기에 게으르지는 않다. 그래서 내 가슴에는 수없이 많은 아픔들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의문이 떠오른다. 그렇게 억울한 삶을 당한 사람들. 기가 막히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하늘나라 밖에는 없는 것인가. 그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동안 자신들의 자녀들과, 후손들 또한 대대로 고통과 눈물에 젖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인가. 이 세상의 여러 군데에 산재된 고통 받는 대지에, 최소한 수 백 년 동안을 고통에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는...
기도할 때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들이 내 눈에 밟힌다. 내 입에서 씹히는 맛있는 음식만큼 그들의 아픔이 더 강하게 느껴져 온다. 그러나 나는 용기 없고 나약한 사람일 뿐이다. 때로 가끔씩 무릎 꿇고 엎드려서 흐느낄 뿐이다. 그러나 그 뿐. 나는 그들을 위해 이따위 글이나 써내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없다. 그럴 때 가끔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바로 내 생애의 젊은 시절에 읽었던 ‘강아지 똥’이다.
기도는 산을 옮긴다고 하지만, 내가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가 아무리 눈물 젖은 글을 써도 오늘도 세상에서 강자의 약자에 대한 살육과 유린은 그치지를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이 가득한 곳일 뿐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안전하게... 우리 모두가 새로운 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은 신음하고 절규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서서히 생을 마감해 가고 있다. 우리가 더 많은 안락과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욕망의 노예가 되어있는 바로 그 시간에.
수많은 ‘강아지 똥’ 책이 팔리는 나라에서 어떻게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은 다음에 하기로 하자. 오늘 나는 문득 오늘 아침 내 눈에 흐른 눈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이들, 치떨리는 치욕에 고통당하는 이들, 그들에게 한 가지 위로 ‘강아지 똥’이라는 그들을 위한 동화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길바닥에 버려진 강아지의 똥처럼 비참하게 썩어가게 되겠지만, 언젠가 그들이 흘린 눈물과 그들이 흘린 피의 증언이 자양분이 되어 한 송이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꿈을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고통에서 평안을, 굶주림과 비참한 삶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삶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오늘 그들의 썩어가는 살과 말라가는 피들이 어디에선가 새로운 미래를 여는 희망의 열쇄가 될 것이다. 그들이 죽어가며 내 밷는 외마디 절규가 메아리가 되어 이 땅을 울리고 또 울릴 것이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마음이 열린 사람의 귀에는 그들이 죽음의 행진을 하며 불렀던 슬픈 노래, 아니 희망을 노래하던 그 노래가 생생하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것이다.
나는 내 얼굴에 흐르는 참회의 눈물을 훔치면서 한마디 나 자신에 대한 위로의 말을 할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또한 세상에 가치 없는 죽음 또한 없다.” 오늘 그들의 시신은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그들의 삶은 존엄을 빼앗기고 유린당하지만, 언젠가 찬란한 부활의 날이 올 때 그들은 한 송이 꽃으로 되살아나 이 세상을 밝게 비출 것이다. 그토록 잔인했던 우리나라의 5월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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