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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청주에는 경기도 원미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김 선생도 수업 마치고 달려왔습니다. 우리 셋은 밤새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김소월의 '산유화' 이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소설을 쓰고, 대학 시절에는 시를 습작하면서 문학을 꿈꾸었던 그는 시를 다시 써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저의 제안에 그냥 쓸쓸히 웃었습니다. 이 글은 돌아와서 그에게 보낸 공개 편지입니다.
1.
김 선생.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네.
대학 때부터 보아 왔던
정리되지 않은 그 머리스타일...
아직 그대로더군.
그런데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제법 많이 눈에 뜨이던
은빛으로 빛나는 그 낯선 머리카락들은 왜 달고 나왔나?
자네도 기어이
은백양빛 잎사귀를 바람에 맡기고 있는
반백의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나?
2.
요즘도 책을 일주일에 세 권씩은 읽는다구?
고3 언어영역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치고 있으면서,
그만하면 이제 어엿한 입시 전문가가 되어 있을 법도 한데,
국어교사가 할 일은
죽어있는 글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라구?
고3 수업을 그렇게 해 왔다구?
아직도 자네는 뭘 모르네.
요즘 뜨고 있는 EBS 강의도 안 들어봤는감?
고3 수업은 말이여
밑줄 치고 동그라미 치고, 별표시 꽝꽝 해가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여!
시를 만나면 시를 죽이고
소설을 만나면 소설을 죽여야 혀!
펄펄 살아뛰는 동해바다 활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난도질을 해야
그래야
맛있는 활어회가 되지.
그렇지 않은가,
이 슬픈 사람아...
3.
원미고등학교에 있다니까
양귀자의 "원미동 시인"이 생각나네.
수업이 없는 빈 시간에 잠시
학교 주위를 살펴 봐.
어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지도 몰라.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는"
은사시나무....
원미동 시인의 마음 속에 자라고 있던.
그 나무를 손으로 어루만져 봐.
밑둥치 어디쯤에 사람 귀처럼 생긴
생채기가 있을지 몰라.
사람들은 모를테지.
그 생채기가 사실은 은사시나무의 귀라는 것을.
그 귀가 사실은
은사시나무의 생채기라는 것을.
어딜 가든
부디 잊지 말아주게.
어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귀가 있는
은사시나무 한 그루.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는...
4.
자네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문득
술 생각이 났네.
어젯밤에 우리가 마셨던 희석식 그 화학주가 아니라,
오래 숙성시킬수록 향기가 나는 진짜 술 말이야.
17년을 숙성시킨 술은 값이 좀 비싸데.
23년을 숙성시킨 술은 그보다 더 값이 비싸데..
그래서 난 아직 23년 된 술은 마셔보지 못했지.
김선생,
나는 알고 있어.
우리가 스무몇살 때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놓았던
커다란 술항아리를.
그때
성급했던 우리는
아직 숙성이 덜 된 시금털털한 그 술을
꺼내서 함께 마시고 취하기도 했잖아?
김선생,
나는 알고 있어.
자네 가슴 속에 묻어놓은 항아리는
내 가슴 속의 항아리보다
더 크고, 더 깊다는 것을.
김선생,
이제 그만
그 항아리를 꺼내 놓게.
25년 숙성된 그 술맛이 너무 궁금해.
그 향기가 어떨지 너무 궁금해.
일주일에 세 권씩 책읽으며 숙성시킨 그 술맛이 그리워.
50을 앞둔 고참교사가
아직도 죽이는 수업이 아니라 살리는 수업을 하면서
숙성시킨 그 술맛이 그리워.
김선생,
이제 그 술을 나눠 마시세.
자네, 나 술 좋아하는 거 알잖아?
자네 머리카락 모두 은빛으로 변할 때까지
숙성시키고만 있을 건가?
5.
우리가 각자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이라면
그 꽃이 좋아 산에서 사는 새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산에서 새는 왜 우나?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꽃이 좋아서 울지...
그것이 자네가 말한
"관계성" 아닌가?
오늘은 왠지
그 산새 울음소리가 듣고 싶네.
나도
은사시나무 생채기 같은
귀가 있어
그 울음소리 들을 줄 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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