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은 일종의 반성문

연극 <천태만상>을 보고

검토 완료

김명신(hatsal)등록 2004.06.05 14:07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연극. 요즘 들어 이렇게 두 개로 나뉜 극들이 유행인가보다. 제목부터 딱부러지고 뭔가 절단이 날 것만 같아 무더위를 이길 수 있는 재미난 연극이라 생각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절대사절>

정말로 죽어도 끊고 싶은 것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것들은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 가치관의 혼미로 상식은 이미 상식의 자리를 내놓은 지 오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세상사들을 꼬집는 극이 아닐런지.

신문 구독 사절로 인해 한 인간이 미치게 되고, 그것에 왜곡된 순응을 보이게 되는 것은 점점 학습이 되나보다. 신문 보급소 총무의 여자에 대한 순응이 급기야 관객의 온몸이 소르라칠 정도의 음산한 목소리와 다구침으로 변화될 때까지 모습은 그리 느리게 오지 않는다.

결국 여자는 미치고 신문 배달을 하지 않는 총무는 오늘도 잔인한 신문을 그녀의 집에 배달할 것이다. 지독히도 나쁜 꿈이 연장되는 것.

매체 여기저기서 크든 작든 장식하는 이야기들 중에 섬찟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소한 일이 죽음을 불러오고, 생각하기조차 힘든 패륜까지도 초래하는 세상 언저리.

보급소 총무의 두 얼굴을 보며 더욱 섬뜩한 것은 어쩌면 얼굴에 여러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 같아서는 아니었을까.

<대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웃을 거리를 마련한 연극은 아주 짧고 명쾌한 명제를 반전으로 갖고 있다.

"자서전은 반성문이다"라는 명제.

아주 짧은 이야기를 늘려놓은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사아사이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배우의 몸짓과 말들은 웃음 속에서도 세상을 비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편안하게 볼 수 있었던 듯하다.

두 연극을 보고 나서 느낀 점을 대략 정리하자면,

첫째, 연극이 두 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져서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배우의 중복 출연으로 다음 극으로의 몰입에 장애가 되었다.

연극이 바뀌고 캐릭터가 바뀌면서 관객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은 좋았지만, 공포는 웃음을 누르는 힘이 작은가 보다. 게다가 한정된 시간 내에 한 배우가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앞에서 연기한 부분의 음산함이 비록 웃을 거리를 제공하는 장면이 있지만 자꾸 겹치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둘째, 두 개 연극 모두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극이었지만,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첫번째 연극은 매우 사실적인 반면 두번째 연극은 웃을 장면이 많아서인지 매우 가벼웠다. 사실 그리 가벼워할 극은 아니지만 비아냥거릴 거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극이 끝날 때까지 첫 연극의 소스라칠 듯한 긴장감이 남아 두 번째 연극 내내 그것이 바탕에 깔려 있어 방해가 되었다.

세째, 소품의 진지성이다.
앞 연극에서 등장하는 배우들의 소품은 극을 이끌어가는데 지대하다. 수많은 신문과 가스총, 휘발유. 하지만 뒤 연극에서는 그리 많은 소품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작가의 타자기 정도. 아쉬웠던 것은 작지만 두 사람이 나누며 마시는 찻잔에 연기라도 피워올랐으면 어땠을까 한다. 담배연기보다는 커피 향이 관객에겐 더 좋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앞 연극은 뒤 연극에게 졌다. 다소 늘어놓은 듯한 뒤 연극에서 결국은 "자서전은 일종의 반성문"이라는 명제가 뒤통수를 잡아당겼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어두운 골목을 돌아와 문 앞에 섰을 땐 보지도 않는 신문이 문 앞에 놓여있을 것만 같은 공포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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