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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보다 박정희가 싫다?”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신지호 교수의 칼럼 제목이다.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물음표가 붙어 있는 걸 보니 김일성보다 박정희가 싫다는 게 신 교수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가 보다.
무슨 내용인가 궁금 해 읽어 봤다. “김일성이 더 나쁘니, 박정희가 더 나쁘니?” 라고 ‘옛 운동권 친구’에게 물었단다. 오랜만에 술자리를 함께 한 친구에게 던진 질문치고는 참 고약하다. ‘운동권’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로는 어떤 대답을 해도 좋은 소릴 듣기는 힘든 질문이다.
돌아온 답은 이렇단다. “박정희가 나쁜 것은 확실히 알겠는데, 김일성은 경험해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우문에 현답이다. 어느 한 쪽이 더 나쁘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고도 대답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지호 교수는 방방 뜬다. 황당하단다.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했단다. 친구의 대답을 두고 ‘박정희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김일성에 대한 너그러운 침묵’ 이라며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싫어하는 사람들’이자 ‘외눈박이 역사인식 세력’이란다.
신 교수는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싫어하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면 독자들 모두가 공분하여 자기 편에 설 것을 기대하며 <동아일보>에 기고했겠지만,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 역시 그 친구와 같은 대답을 들려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에워싸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면에서는 박정희보다 김일성이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날아드는 돌을 맞기 전에 그 이유부터 말해보자.
지난 98년 <동아일보> 기자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비밀리에 선물로 갖다 바친 게 하나 있다. 1937년 김일성이 주도한 항일투쟁 '보천보전투'에 대해 보도한 <동아일보>의 호외의 순금 원판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가짜 김일성에 대한 갖가지 주장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동아일보>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인물임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 김일성의 항일 활약상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이었던가 하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식민지시대에 박정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미 많이 알려진 바 대로 '일본인보다 더 일본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그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이름으로 만주군관학교를 1등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한 후 만주에서 일본군 소대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 앞에 우린 누구의 손을 들어 줘야 하나.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된 후 수 많은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그의 집권동안 세계 유례가 없는 독재를 했으며, 아들 김정일에게 정권을 세습하기도 했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압살했으며, 경제적으로도 실패하여 주민들이 굶주림을 겪게 했고, 견디지 못한 많은 주민들이 탈북하여 타국을 헤매게 만들기도 했다.
박정희는 어떠했는가. 4·19로 피워 낸 이 나라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좌익척결을 명분으로 국민의 인권을 유린했고, 부하의 총에 맞아 죽기 전까지 끝도 없는 유신독재를 획책했다. 재벌과 결탁한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은 노동자 농민의 희생을 , 명분없는 베트남전 파병은 우리 군인의 희생을 불러 일으켰다.
이쯤되면 누가 더 나쁜 짓을 했는 지 경쟁이라도 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들을 앞에 두고 관점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해방 이전의 행적을 두고 김일성이 낫다고 할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더 낫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지 반드시 박정희가 낫다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다.
신 교수는 박정희에 대한 이런 비판적 문제의식이 단순히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고 깎아 내리고 있다. 웃기지 마시라. 난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적도 없고, 박정희와 특별히 감정 상할 만큼 직접 맞섰던 세대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제껏 습득한 단촐한 지식에 비쳐 봤을 때 박정희에 대해서는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는 게 옳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박정희를 논하면서 박정희에게는 혹독하면서, 왜 김일성에게는 관대하느냐고 따지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은 전혀 별개의 존재로 각각 평가를 내리면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 나온 이후 부터는 <동아일보>가 현 정부에 ‘철 없는 운동권’, 또는 ‘무책임한 좌파’의 딱지를 붙이려 애 쓰는 게 눈에 보인다. <동아일보>의 지면이 대통령에 대한 한층 더 경박하고 무례한 단어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만평에 운동권의 모습을 한 인물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도 요즘의 일이다.
신지호 교수의 이번 글은 이런 <동아일보>의 입장에 충실하다. 북한에 호감 내지는 너그러운 침묵으로 대하고, 김일성보다 더 박정희를 싫어 하는 운동권 출신이 정권을 잡고, 다수당을 차지 한 게 못마땅하다는 거다. 후하게 쳐줘도 중도보수에서 몇발 벗어나지 못하는 현 정부를 두고 ‘친북수구’로 몰아세우고 싶은 거다.
하지만 어쩌랴. <동아일보>가 현 정부를 ‘친북수구’라 몰아세워도 북한에 아부 하느라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동아일보>의 순금원판을 제작해 갖다 바친 게 바로 <동아일보>라는 사실을 온 국민이 다 알아 버렸으니 말이다. 친북수구라는 말이 <동아일보> 앞에 더 잘 어울려 보인다.
신 교수가 이야기 한 “외눈박이 역사인식”을 극복해야 할 대상은 다름아닌 현 정부에 대한 적개심으로 평상심을 잃은 <동아일보>가 아닐까. <동아일보>의 자랑스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평상심을 잃은 지금의 모습은 안타깝다. 신 교수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동아일보>에 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자. 나는 <동아일보> 속에서 개명된 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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