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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4월 28일은 임진왜란 당시 충장공 신립장군과 8천 고혼이 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날이다. 어제(6월15일)가 바로 그 날이다.
어제 충주의 탄금대 8천고혼 위령탑에서는 충주문화원(원장 정휘철) 주최로 평산 신씨대종회, 순천김씨 대종회를 비롯한 한창희 충주시장, 권영관 충청북도의회의장과 김남중 충주시의회의장 등 각급 기관단체장과 유족, 시민,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열렸다.
추모의식에 앞서 한국무용협회충주지부 표은정씨의 살풀이 춤으로 고혼들의 넋을 달랬으며 한창희 충주시장의 추념사, 임연규시인의 추모시 낭송, 권영관 충북도의회의장과 김남중 충주시의회의장의 추모사에 이어 기관단체장들의 헌작이 있었으며, 참가자들의 헌화와 분향, 조총발사,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에 대한 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정휘철 문화원장은 위령제를 갖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일본은 21만의 병력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15일 동래성이 함락되었으며, 4월25일에는 상주를 점령한 일본군이 26일에는 문경을 점령한 후 조령을 넘었다.
나라가 위급지경에 이르러 충장공 신립장군은 90여명의 군관만을 이끌고 충주로 향하였으며 오는 과정에서 8,000여명의 군졸을 모집, 북상하는 왜군과 탄금대에 이르렀다. 28일 15,000의 고니시(소서행장)군이 3개대로 나뉘어 공격해 왔고 신립장군과 김여물 부장을 비롯한 8,000여 군사들은 목숨을 던지는 처절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배수진(背水陳)이라는 세계 전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부대원들이 순절하는 옥쇄작전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조련된 군사력과 조총을 앞세웠지만 조선군은 위국과 충절의 단심만으로 대항하여 용맹을 떨쳤던 것이다. 이제 열두대 뒤로 배수를 이루웠던 남한강과 달천강이 도도하게 흘러 400여년 전 그 토록 용맹했던 신립장군과 팔천의군의 애국충절과 천추의 한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에 우리 등은 충장공 신립장군과 김여물 부장을 비롯한 8000여명에 이르는 의군들의 뜻을 받들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팔천고혼 위령탑을 건립하였으며 위령제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한창희 충주시장은 추념사를 통해 “충주시에서는 신립장군과 8천 고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늦게나마 지난 해 위령탑을 세우고 제를 올리게 되었지만 이제라도 고이 잠드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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