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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버지께
어머니, 제가 좀 유치해지렵니다. 옷 안 사줘서 삐졌습니다. 어머니 비싼 옷에 샘이 나서 삐졌습니다. 저는 늘어난 막 메리아스에 싸구려 옷 계속 입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제 속옷 정도는 용돈으로 직접 사다 입도록 하죠. 저도 좋은 옷, 잘 안 늘어나는 티셔츠, 비싸고 멋있는 운동화 오래오래 쓰면 좋죠. 그런데 그건 비싸잖아요.
집에 돈 별로 없는 거 아는데, 옷은 이것저것 입고 싶고, 그래서 싼 거 사 입었습니다. 책임지죠 뭐, 예- 집에서 공부나 하면 옷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데 속옷 사러 나가려니 입을 옷이 없네요. 메리야스 팬티는 좀 사다 주시죠. 비싸고 좋은 거 오∼래 입을 걸로요
그리고 아버지, 대화 도중에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고요? 결국 누가 지르는 겁니까? 제가 아버지 목소리로 소리지릅니까? 제가 뭘 말씀드리면 제가 아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아버지 아는 것은 옳은 것이지요? 저보고 그런 말씀하시지요. "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다." 제가 하고 싶군요, 그 말. "아버지 아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때로 제가 틀리는 경우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치 않은 것을 우겨서 틀리는 경우가 있었나요?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면 다른 생각도 듣고 더 타당한 근거가 있으면 그 쪽으로 더 생각하고… 좀더 개방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고… 확실히 아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하고…. 저는 그렇습니다.
저와 다른 생각은 근거를 들어보고 타당하면 따라가고 부당하면 반대하고…. '대화'라는 말은 서로 말을 들어주고 서로 말을 하고 그러는 것 아닌가요? 일방적인 주입은 받는 쪽을 답답하게 합니다.
'내 교육관을 증명해 줬으면 좋겠다.'라고요? 뭡니까? 저는 아버지 교육관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해야 되는 건가요? 아버지 체면과 아버지 말빨을 위해 점수를 높이고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건가요? 저는 뭐죠? 물론 제가 잘되면 저한테도 좋은 거죠. 하지만 아버진 아버지 얼굴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왜요? 건방진가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좀 똑똑하다고 까부는 건가요? 저요, 화났습니다. 선생님들께 저한테 할 말은 제게 하라고 좀 해주시죠. 성적이 안 좋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면 열심히 할 사람은 제 자신이지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아버지 입에서 선생님들 말 전해듣는 거 참 싫습니다.
성적이 어떻고 저떻고…. 성적은 좀 성적표 나오거든 이야기하죠? 아침에 등굣길에 교장선생님 "열심히 해라!" 저녁에 하교 길에 교감선생님 "시험 잘 쳤냐?" 학교서 지나다니면서 "니 요즘 공부 안 한다며?" 차 태워주면서 "공부 좀 해!" 가르치시는 선생님, 안 가르치시는 선생님 할 것 없이 다들 볶아대는 것도 참….
그리고 오늘 아침은 뭡니까? 저는 몰라도 동현이랑 근환이는 지각하면 어떡해요? 제 돈으로 택시비 냈습니다. 맨 정신에 그렇게 유치할 수 있다니 참 놀랍더군요. '경어'를 상당히 강조하시는데요. '경어'라는 게 존경하는 마음이 담겨야 나오는 게 아닐까요? 반말이 기분 나쁘면 한 번 씩 엄한 표정으로 "경어를 쓰도록!" 하시는데 그런다고 권위가 서고 말빨이 먹힙니까? 모범을 보이고 존경을 받을 만한 아버지가 되어 주실 수 없나요?
엄마 탓 자주 하시는데 근본적 원인은 아버지 자신한테 있습니다. 술에 취해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시는 모습은 딱합니다. 담배도 못 끊으시는 걸 스트레스 탓하시는데 무엇이 근본적 원인인지 인정을 좀 하시죠! 참고로 제 성적이 떨어지는 건 제가 게을러서입니다.
지용이에게
지용아! 그래, 전부 내가 잘못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넌 그러면 안 된단다. 왜냐구? 지금 너의 태도는 나를 아버지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아무리 시원찮은 아버지라 하더라도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잖아? 그래 소리지른 것은 잘못했다. 앞으로는 조심하마.
내가 너에게 화가 나는 것은 너는 상대를 인정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네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한계(限界)까지도 말이다. 그래, 내가 알면 뭘 얼마나 알겠니? 그러나 나는 너의 아버지란다. 그 인연을 끊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 내가 틀렸다고 해서, 엉터리라고 해서 네 아버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아?
나를 그렇게 아버지로 인정한다면 나는 네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날보고 맨 정신에 그렇게 유치할 수 있다니 참 놀랍더라고…. 그런 말은 적어도 아버지에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란다. 그래 나 유치하다. 아니 그 때는 더 유치하고 싶었다. 왜냐구?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너 한 번 생각해 보았니?
이틀째였지? 네가 말없이 네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던 것이, 밥을 먹지 않고 아침에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고함을 질러도 꿈적도 하지 않았던 것이 말이다. 너 아버지에게 그러면 안 된다. 아버지의 기분을 한 번 말해볼까? 아버지 나름대로는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가며 출근시간까지 네게다가 맞추고 퇴근까지도 너를 태워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너하고의 관계가 부자지간이기 때문이지. 내가 너에게 임금을 받는 고용관계가 아니란다. 나는 그 때 너의 전속기사 같은 느낌과 기분이었다. 내가 모시는 사장님의 자제라면 먹고살기 위해서 태워주었을지 모르지만 도저히 태울 수가 없었다. 아니 사표를 쓰고 안 태워주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동현이와 근환이는 내 아들을 태울 수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고려의 여지가 없었다.
나의 이런 기분 이해가 되니? 유치하다고, 그래 나 유치하다. 그러면 그러는 너는 아주 고상(高尙)한 거니? 그렇게 아비가 부르는 말에 대답도 하기 싫은 아버지 차에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럽게 타려고 했니? 나는 오히려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너는 바로 전화해서 '내가 아이인지 아빠가 아이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다시 전화하니 받지 않더구나. 너는 참 편리하더구나. 필요할 때마다 아이를 내세울 수 있어서 말이다.
너는 어머니에게는 왜 '유치해지렵니다'하고 시작했니? 음! 옷 안 사줘서 삐졌다구?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아버지 대접을 안 해줘서 삐졌단다. 그래서 맨 정신에 그렇게 유치해지고 싶었단다. 너 편리하게 그러지 마라. 나는 오히려 내가 어른인지 네가 어른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다. 어른도 성인(聖人)이 아니라면 아직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부분이 많단다.
물론 네가 내 나이 되었을 때 내 정도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겠느냐마는 내가 봐도 네 어머니가 자기 옷만 사 입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더라. 항상 스스로는 헐벗으면서도 우리들의 옷은 우리 형편 이상으로 비싸고 좋은 옷으로 사주던 내 어머니에 비하면 네 어머니가 너에게 그런 모습으로 비칠 수가 있겠지. 나하고도 그런 부분으로 마찰이 있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란다. 나는 네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밥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화가 나 있었는지 전혀 몰랐었다. 너는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면 너와 다른 생각도 듣고 더 타당한 근거가 있으면 그 쪽으로 생각하려고 애쓰고, 확실하게 아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하고 다른 생각도 근거가 타당하면 따라가고 부당하면 반대하고' 아주 합리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도 네가 자신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비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미 말했다만 한자능력검정시험만 하더라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그것도 미리 모의고사를 스스로 쳐보고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돈을 내고 원서를 내고 떨어지는 것은 '혹시나' 하다가 '역시나' 한 것이니? 적어도 나 같으면 다음으로 미루고 더 준비해서 원서를 내지 그냥 그렇게 반복하지는 않는다.
다른 선생님들께 나는 항상 너한테 할 말은 너에게 하라고 하지. 내가 왜 하지 않겠니? 그러나 그게 다 네가 잘 되라고 말한다는 것이 네게는 귀찮을 정도가 돼 버리는 것 아니겠니? 앞으로는 지금까지 보다 더 철저하게 내가 듣고도 네게 전하지 않으마. 또 학교 생활하면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네가 스칠 때마다 자주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교직원 자녀니까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겠니?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 설마 네가 스트레스 받아서 공부하지 마라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않겠니? 동기가 불순한 것이 아니라면 듣기 싫어도 받아넘길 수는 없겠니? 교직원 자녀가 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더 있으며,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두 그런 선생님들의 태도를 너처럼 볶아댄다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경어를 쓰라고 한 것은 나를 억지로 존경하라는 것은 아니다. 말이라는 것은 생각과 같이 가는 것이다. 말을 하다보면 그렇게 가는 부분도 있고, 반말이 습관이 되면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네게 불만투성이의 아버지라 해도 아버지에게 반말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란다. 그리고 말을 그렇게 하다보면 하는 사람도 그 말에 딸려갈 수 있지만 듣는 사람도 그 말에 대해 기분과 감정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치한 아버지라 하더라도 아버지 대접을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 네가 기본도 지키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유치하다느니, 맨 정신에 그렇게 유치할 수 있다니 참 놀랍다느니 하는 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모습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주변에 대해 유치하다고 말할 수 있는 너는 상대적으로 유치하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네가 고2나 되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반말이나 지껄여서 되겠느냐? 존경할 수 없더라도 인연을 끊기 전에는 반말을 하지말고 경어를 사용하라는 말이다.
'참고로 성적이 떨어지는 건 게을러서 그렇다고?' 음 그래 내가 그걸 모를까봐 가르치는 거냐? 아니면 인정하고 그냥 놔두라는 거냐? 그래 너는 내가 아버지 자격이 없으니 스스로 반성하기나 하고 더 똑똑한 네가 잘 알아서 하고 있으니 네 하는 대로 가만히 두고 보라는 거냐? 네가 하도 대단해서 나는 지금 네 말을 듣고 그렇게 하고 있기는 하다만 내 마음은 몹시 불편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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