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여름휴가 10%, 인권에 쓰자

"악취도 상관없어, 네가 좋으니까"

검토 완료

육성철(ysreporter)등록 2004.07.28 13:57
애니메이션 영화는 이미 그 자체가 만화영화 내지는 만화로 불리면서 여전히 영화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마이너 장르다. 더욱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대다수를 이루는 단편은 극장에서는 물론 비디오 대여점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며, 혹시 어떤 테마를 갖고 접근한 작품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도 아주 가끔 국내외의 몇몇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극장과 비디오숍으로 찾아올 때가 있다. 그 중 최근 덴마크·프랑스 합작으로 야니크 하스트루프가 연출한 「곰이 되고 싶어요(원제:The Boy Who Wanted to Be a Bear)」(2002년/75분)는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인간주의, 즉 근대 유럽이 계몽의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백인-문명-남성-이성애-어른-국민만을 ‘인간’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동양-유색인-미개-여성-동성애-어린이-외국인, 그리고 ‘동물’을 인간 ‘이하/이외’의 존재로 배제해 온 인간관로부터 벗어나 서로 다른 ‘삶’의 공존에 따뜻한 눈길을 돌리는 작품이다.
새끼를 사산한 북극곰 부부가 인간 부부의 아기를 훔쳐다 키우는 데에서 시작하는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비슷한 모티프를 갖는 디즈니의 「정글북」(1967)과 「타잔」(1999)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향한다. 야생 소년 모글리가 결국 인간 소녀의 눈길에 매혹되어 마을(=문명)로 돌아가는 「정글북」, 그리고 백인 남성 타잔이 고릴라 사회(=흑인 사회=아프리카)의 지배자가 되는 「타잔」은, 서로 정반대로 보이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모두 18세기 근대 유럽의 인간주의를 충실하게 따른다.
반면에 「곰이 되고 싶어요」에서 인간 소년은 자신이 곰과 다르다는 것을 신체 감각으로 느끼지만, 인간을 동경하기는커녕 ‘마법에 걸린 곰’이라는 엄마 곰의 말을 믿는다. 영화 후반에 그는 세 가지 시련을 극복하고 마법에서 풀려나 진짜 곰이 되지만, 이 과정은 동물 사회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엄마 없는 거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엄마를 떠나게 되는 계기는 대단히 리얼리즘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즉 아버지-인간이 엄마-곰을 살해한다(아빠-곰의 부재는 실제 북극곰의 생태에 근거한다). 이 인간 아버지는 “나는 네 아버지다”라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 앞에 나타나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 ‘인간화’의 요구는, 가정 밖으로 나가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사람=남자’ 취급을 받는 가부장제 한국 사회의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혈연이라는 인간적 신화를 애초에 갖고 있지 않은 소년에게 이른바 친아버지는 엄마의 살인자이며 삶을 억압하는 지배자일 뿐이다.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년은 세 가지 시련, 특히 고독이라는 마지막 시련을 이겨내고 진짜 곰으로 돌아간다. 마치 아버지적 질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변신」의 탈주선을 그린 카프카처럼 이 영화 는 소년의 신체가 곰으로 변신하는 마술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불가능하리라 믿어지는 일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질 때 순식간에 그것은 감각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이 되어 버린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실사 영화와 달리 쇼트 대신 프레임 단위의 촬영 방식에 근거하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힘이다.
「곰이 되고 싶어요」가 인간에게 보여 주는 횡단적 감성과 상상은 근래에 유럽 사회가 부딪혀 온 현실적 과제들을 환기시킨다. 이미 엄청난 수에 이르는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 분쟁 지역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난민들, 새롭게 EU에 가입하는 동유럽 국민들, 그리고 멸종의 위기에 처한 동물들, 이들의 삶과 권리를 보장하는 동시에 충돌 없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는 전지구화 현상 속에서 한층 비중이 더해지고 있는 질문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곰이 되고 싶어요」가 취하는 낙관적인 ‘의지’는 영화 속의 다음과 같은 대사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너한테 악취가 나도 상관없어, 네가 좋으니까.”이것은 소년을 처음 만난 소녀 곰이 인간 냄새를 맡으며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사회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작품의 본래 취지가 잘 살려지기보다는 훼손된 면이 있어 안타깝다. 극장 개봉을 위한 홍보문이나 비디오의 해설문만 봐도, 작품 속에서 모처럼 동시대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세심하게 묘사된 북극의 토착민 이누이트가 에스키모라는 식민지주의 시대의 이름으로 잘못 불려지고 있다. ‘조센진’과 같은 식의 역사를 지닌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 영화의 미술 양식에 대해서도 ‘동양적’이라는 식민지주의적 어휘가 「뮬란」에 이어 또다시 동원되었다. 불행했던 역사를 민족주의 이외의 시선으로 성찰하려 노력하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사실 가장 끔찍한 것은, 한국어 녹음에서 아내만 남편에게 높임말을 쓰도록 연출된 결과(자막판은 미확인), 본래의 대등한 남녀 관계가 종속적으로 변질되어 버린 점이다. 단일민족이라는 신화 아래에서조차도 우리 안의 여성이라는 타자의 복종과 희생을 강요해 왔으니, 그럼 과연 우리는 우리 안에서 지금 함께 살고 있는데도 자꾸만 피부색과 혈통과 국적을 갖고 우리 바깥의 존재로 배제하려 하는 수십 만의 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언제쯤 마음을 열게 될지, 이런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그럴 ‘의지’가 있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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