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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자유’에 대한 탁월한 비유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공감한 적이 생각난다. 자유라는 것은 어떤 존재가 그 것의 존재 목적에 충실 할 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빨간색의 멋진 스포츠카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무한으로 질주하도록 만들어졌다. 무한으로 달리는 스포츠카는 그 위에서 속도감을 느끼며 자유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 스포츠카가 시골의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도로위에 있다면, 제 속도를 내지도 못하고 먼지만 풀풀 날리며 있을 것이다. 스포츠카가 있어야 할 곳은 시골의 포장도 되지 않는 도로 위가 아니라 잘 포장된 고속도로 위인 것이다. 자유를 느끼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헛되거나 낭비하는 것도 절대로 아닐 것이다.
돈과 명예보다는, 음악을 사랑해서 그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헨델. 동생인 파리넬리가 있어야 자신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리카르도. 외모도, 관습과 제도의 얽매임에도 상관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자유를 느끼는 알렉산드라. 진정한 음악을 하고 싶지만 형인 리카르도로 인해, 인기를 의식한 기교와 동생의 천재적 목소리를 돋보이게 하는 껍데기로 짜여진 그의 음악과 헨델로 대표되는 진정한 음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파리넬리.
영화 <파리넬리>는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결국, 이들은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내고, 그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의 기쁨과 목적에 맞게 창조된 자유를 맛보게 된다. ‘카스트라도’라는 비극적 슬픔의 존재가 주인공 임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안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어느 한부분이 장애를 맞고 있다. 신체적으로 남자라 할 수 없는 파리넬리가 그렇고 혼자서는 존재의식을 갖을 수 없는 리카르도가 그러하며, 경제적으로 부족하고 힘든 헨델이 그러하다. 그러기에 이들이 갈구하는 자유는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모두 장애인들이다. 모든 것을 수치로 판단하려는 그 혀를 내두를만한 단순함이 그렇고, 돈이 주는 기쁨외에는 가치없다고 생각하는 그 천박한 사고방식이 그러하며, 제도안에 합류하지 못한 자를 낙오자 취급하는 기형적 발상이 그러하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숨이 막히고, 떨떠름하게 오염된 공기를 마셔가며 살아가지만, 슈펭글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도시를 떠날 수 없는 도시인들이 되어버렸다.
기형의 세상안에서 기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야 정상인 취급받는 세상.
영화를 보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며,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 말이다. 나도 결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행복한 미소를 가지고 자유를 느낄테니깐 말이다. 순간 순간 그 자유를 느끼며, 행복한 미소를 흘릴 때가 많지만, 세상은 그 잔잔한 자유안으로 돌을 던져 파문을 만들고, 유쾌한듯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바라보기 일 수이다.
꿈을 꾸며 산다는 것은 참 아름답다.
일생을 이러한 아름다움으로 채우며 세상에 태어난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면 너무나도 축복된 삶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삶을 꿈꾼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몸으로 느끼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말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요, 제도화된 사회 속에서 경쟁하며 동료를 누르며 쾌감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닐 것이다. 세상의 창조자께서 세상도 만들고, 나도 만들었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스포츠카인지 거친 돌길을 오르내릴 수 있는 찝차인지 아니면 시골에서 논에 물대러 갈 때 쓰이는 어느 할아버지의 멋지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자전거인지, 그리고 내가 지금 돌길위에 있는지 아스팔트위에 있는지, 엉뚱하게도 바다 앞 모래사장에 있는 것은 아닌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찾아가야지. 파리넬리처럼. 내가 있어야 할 그 곳. 자유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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