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때론 힘이 된단다

두 딸의 '슬픔의 축제'와 여고생들의 꽁꽁 닫아 놓은 눈물의 빗장문

검토 완료

윤지형(besanson)등록 2004.09.06 08:47

소희는 말한다. "이 영화는 무서운 게 아니라 너무 슬퍼." ⓒ 윤지형



일요일 오후 거실로는 무섭고 슬픈
영화 <장화 홍련> 주제곡이 흘러나오는데

"언니 한 번만 더 틀어봐, 응?"
"이젠 됐어. 또 울려고?"
"어쨌든 한번만!"
전축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열살 먹은 둘째 딸아이 소희는 금세 흐느끼기 시작한다.
"정말 그럴 수가 있어? 그때 언니가 2층 방으로 올라가기만 했으면 동생을 살릴 수 있었는데!"

소희의 그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중학교 2학년인 제 언니 주희는 그러는 동생을 짐짓 놀려주려 들지만 웬 걸? 처음부터 장난이 아닌 동생의 슬픈 감정에 오히려 동화되고 만다. 정말이지 소희의 가슴은 거의 미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두 녀석은 서로 껴안고 아주 서럽게 엉엉 운다.

지난주 일요일의 우리 집 거실 장면이다. 아닌 밤중에 벌어진 한바탕 눈물 소동이라고나 할까? 언젠가 내가 사온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비디오는 일찌감치 두 아이의 눈물을 쏙 빼놓고 말았는데 그 후 녀석들은 한번씩 그 주제곡을 틀어놓고는 비극적 감정을 반복해 맛보는 모양이었다.

영화가 계모만이 둘도 없는 악녀인 원전을 그대로 따랐더라면 아이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이나 슬픔은 훨씬 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판 <장화 홍련>은 동생의 죽음으로부터 언니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도록 설정해 두었다. 계모를 향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키워감으로써 동생을 계모로부터 지키려고 한 언니는 바로 그 적개심과 증오심 때문에 평상심과 이성을 잃고 결국엔 결정적인 순간에 동생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 것이다.

딸아이들이 연출한 '슬픔의 축제'가
오히려 상쾌하게 다가왔던 건 무슨 까닭?

우리 집 아이들이 강렬한 회한의 감정과 함께 슬픔에 몸을 맡긴 까닭도 여기에 있었을 터다. "아, 그때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녀석들은 가슴 아픈 영화 한 편을 통해 삶의 엄연한 부조리함과 찬란한 비극성을 엿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내게 그 날의 '슬픔의 축제' 상쾌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슬픔이 없는 세상을 소망하지만 ⓒ 윤지형



며칠 전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칠판에다 일본의 단시(短詩) 하이쿠 한 편을 썼다. 늘 해왔듯 짧게 나마 '오늘의 말씀'이라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여름이라서 마른 거야'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이내 눈물을 떨군다.

“왜 그녀는 눈물을 떨구는 거지? 여름이라서 말랐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
나는 묻고 나서 팔짱을 꼈다.

그러나 막 개학한 학교에 채 적응을 못하고 있는 데다 아직은 무더위가 물러나지 않고 있는 답답한 교실 속의 17세 처녀 아이들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나는 '내공'이 필요함을 느낀다. 아이들의 표면적인 무관심에 쉽사리 물러설 순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묻는다. “이 시에 등장하는 그녀는 누구지? 그녀는 또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걸까?” 아이들은 묵묵부답. 그러나 내가 못내 안쓰러웠는지 이윽고 구원자가 하나 나타난다. "시집 간 딸이 친정 엄마에게 고생한단 얘긴 차마 못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들 사이로 웃음소리가 번져나간다. 나는 기사회생하는 기분이다.

하이쿠 속에서 우는 ‘그녀’보다
우리 아이들이 더 잔인한 여름을 보냈을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네? 정말 눈물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구나. 그럼 또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나?” 다시 아이들은 묵묵부답. 이번엔 나는 길게 기다리지 않는다. 침묵의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재미없어지기 십상이다. 본 수업이 너무 늦어지는 것도 문제다. 나는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기로 작정한다.

우리가 보낸 여름을 아세요? ⓒ 윤지형



"옛날에 우리가 못 먹고 살 땐 정말 여름을 나고 나면 다들 비쩍 말랐다. 먹는 건 깡 보리밥에 된장인데 날씨는 덥고 농사일은 해야 하고 아주 진이 다 빠지는 거지. 안 그러고 배기겠니? 그러니까 '그녀'가 얼굴이 마른 건 실제로 그런 힘겨운 여름을 나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만약 그녀에게 남몰래 짝사랑하는 동네 청년이 있었다면? 그리고 여름 내내 그 청년만 연모하며 속을 다 태웠다면? 무심한 그 청년은 돌담길 같은 데서 우연히 '그녀'를 만나자 물었겠지. 왜 그렇게 얼굴이 안 좋은 거야? 그러자 여자는 짧은 한숨과 함께 낯을 붉히며 대답한 거겠지. 여름이라서 마른 거야."

아이들은 아하, 어쩌구 하며 일순 숙연해지는 듯도 한데 그 순간 내 마음 속으론 딴 생각이 물결치면서 콧등이 찡해졌다.

어쩌면 보충수업에 자율 학습에, 오로지 입시 공부만이 절대절명의 숙제가 된 저 유예된 청춘의 여름은 '그녀'의 여름보다 더 잔인했을지도 몰라. 누군가 '주제곡'을 틀어놓으면 아이들은 꽁꽁 닫아놓은 눈물의 빗장을 열며 대성 통곡을 할지도 몰라. 대학입학까지는 누가 뭐래도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되는 그 빗장 말이다.

나는 곧장 본 수업에 들어갔지만 수업이 끝난 후 교무실로 돌아오는 내 머리 속으로는 '오늘의 말씀'은 이어지고 있었다.

눈물 속에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는
고전적 진실에 대한 믿음을 나는 버리지 못한다

얘들아, 공지영이라는 소설가 알지? 그녀가 쓴 중편 소설 제목에 이런 게 있어. '슬픔도 힘이 된다' 그건 15 년 전쯤 참교육과 인간화 교육, 민주 교육을 앞장 서서 외친 1500여명의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슬픔을 겪던 시절의 이야기야. 오늘의 교육 현실을 보면 그 슬픔이 과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슬픔에 있어서 만큼은 나는 경험주의자란다.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이의 슬픔에 공감할 수도, 다른 이를 사랑할 수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주희야, 소희야 그리고 춘향이보다 더 큰 처녀 아이들아, 슬플 땐 마음껏 눈물을 흘리렴. 또한 참을 수 있다면 가슴 가득 넘치도록 참아도 보렴. 정말이지 슬픔은 때론 아주 큰 힘이 될 수 있으니까. 눈물 속에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는 건 변함 없는 진실이니까.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