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24일 정오,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기독인모임은 종로5가에서 광화문 다시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침묵행진을 하고 있다. ⓒ 김종수
기독여민회, 반전평화기독연대, 생명선교연대,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EYCK 등이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기독인모임'이라는 이름으로 9월 15일부터 24일까지 매일 낮 12시부터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광화문 네거리까지 십자가를 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제1차 침묵행진을 벌였다.
목회자 뿐 아니라, 청년, 평신도들로 구성된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기독인모임'은 다시 10월 4일부터 10월 30일까지 국가보안법폐지를 촉구하는 제2차 침묵행진을 벌인다. 그리고 10월내에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는다면 침묵행진은 계속될 것이다.
이들이 이러한 행진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침묵행진에 참여했던 생명선교연대 소속의 한 분의 목사가 홈페이지에 올린 고백의 글(http://www.lifenet.or.kr/wwwb/CrazyWWWBoard.cgi?db=realname&mode=read&num=3510&page=1&ftype=6&fval=&backdepth=1)
이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 월례회를 하며 고백을 하고 싶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요.
95년 11월 새벽에 들이닥친 사람들이 묵비권을 고지하고 저를 차에 태워 수원경찰서을 거쳐 경기도 보안수사대로 끌고 갔습니다. 물론 92년에 벌어졌던 애국동맹사건이 마무리 되는 일이었지요. 세상에는 남한조선노동당사건으로 크게 포장되었던 사건이고 저 자신은 이 조직에 맨 밑바닥에 있던 한 조직원-가입원서도 없는-이며 그 당시 92년도 폭풍을 피했다가 95년에 아무런 활동 없이 그 당시 활동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신문에는 재건사건으로 보도되었더군요. 사건의 개요나 내용을 회상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그저 국가보안법에 걸려있던 제 자신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80년대를 관통한 혁명과 사상의 풍요로움이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요. 내가 보지 못했던 인류 역사의 진보를 위해 헌신했던 혁명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이룬 세계 그리고 그 사상의 원천이 나를 이끌어 당겼습니다.
세상이 사유하는 아니 이미 오래전 그 사유함과 실천함이 폐기 또는 검증되는 사상들이 여과없이 밀려들었습니다. 날로날로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얕은 생각에 세상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 보였고 세상은 분명 불평등함이 존재하였지만 이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 땅이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인지, 신식민지인지 수많은 사회구성체 논쟁이 나를 당기기도 했습니다.
양산리의 하루하루는 나를 풍요롭게 했으며 승리에 대한 확신이 점점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금기인 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또한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 하는 꿈의 나라는 아닐 지라고 우리의 역사적 정통성과 삶의 당당함을 새롭게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반을 이루는 일제하의 무장투쟁과 그를 이어온 주체사상이라는 한 나라를 유지하는 특유한 사상적 흐름을 또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금기를 금기로 여길 이유없이 20대후반과 30대 초반을 보냈습니다. 굉장히 떨면서 불안해하며 새로 접하는 직설적인 사상에 대한 고민가 관심이 많은 저를 지배하였습니다.
비교 평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내온 시간을 뒤로 하고 새로 접한 흐름에 좀 더 깊이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으로 느끼고 사상적 내면을 다듬어 보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조직활동의 제안에 응답하게 되었지만, 깊이 있는 내면의 삶의 성찰은 아니었기에 수배를 받기는 하였지만 안기부와의 협의하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삼년 후에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습니다.
보안법 구속자는 20일을 경찰 수사를 받고 20일간 검찰 조사를 받습니다.
모든 조사간 끝난 시기는 아마 12월 말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책의 목록을 주고 읽은 책을 체크하고, 그 책을 다시 읽으며 독후감을 쓰고 자주,민주,통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모든 유인물과 기독교민중선교단체인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의 정관까지도 북의 통일전선전술에 따른 이적행위가 되어져 나오고 이를 동의 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들이 준비된 프로그램처럼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지인들의 과거전력을 들이대며 같은 유(類)라는 그리고 같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민중교회운동연합에 속해있는 목회자들도 사상적의심이 가능한, 아니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아직 체포되지 않은 범법자라는 것이 그들의 사고였습니다. 그들 앞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보안법 위반의 굴레를 가질수 밖에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이적표현물소지, 책자 모두가 읽어서도 보아서도 않되는 것이었고, 이는 한 쪽 뇌를 막아버리는, 한 쪽 가슴을 절제하라는 그들의 요구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너는 범법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존재를 가능케하였던 법-국가보안법이었습니다.
이 땅에 존재가치가 없는 마약과 같은 존재-국보법 위반자.
그 법 앞에서는 사상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러한 모든 원칙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네 마음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구속사유입니다.
6개월의 기간을 잘 마치고 구치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도 TV에 북의 이야기가 나오거나, 신문에서 그쪽 기사를 보면 외면합니다. 핵문제도, 용천의 폭발도, 장거리미사일도, 개성공단도 저에게는 금기의 기사이며 금기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것을 보고 관심을 갖는 순간, 저는 전과자로서 예전에 가진 사상을 아직도 추구하는 재범자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이미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새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애써 오른쪽 눈으로만 봐야 되는 후천적 본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유함을 잃어버린 그리고 애써 그것을 찾아야 하는 온전치 못한 자가 되었습니다.
육체적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땅에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 낸 사상적, 양심적 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법무부 장관 명의의 사면장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내 활동에 대한 족쇄는 풀렸지만 전 여전히 그 이전의 자유함이 아니라 '이건 걸리는 거지'라는 브레이크 걸린 생을 살아갑니다.
국보법이 폐지된다고 이 왜곡되어진 나의 사유와 자유함이 회복이 되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저는 무엇인가 바꾸어 돌아가기에는 너무 긴 시간을 그 두려움에 갇혀 있었으니까요.
이런 닫힘이 내 어린 아이들에게 또 주어진다는 사실이 너무 슬픕니다.
저는 환자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그 병에 걸려 아직 그 바이러스를 떨쳐내지 못하고 아픔을 앉고 살아갑니다.
근대성을 넘어서지 못한 이 세상에,
근대성을 넘어보려는 그 경계인의 삶이 공감되는 이유도 내가
그 자리에 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해 침묵으로 걷는 기독인들의 내면에는 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국가보안법이 많은 이들의 몸과 영혼과 살림에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 상처를 즐기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고한 수많은 이들을 차가운 감옥과 치욕스런 고문으로 고통을 주었는지에 대한 외침이 응어리져 있지만 그냥 침묵으로 종로거리를 행진하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한 온갖 비난을 화살을 날릴 때, 소수의 기독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을 걸으실 때처럼 말없이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 멈추지 않는 행진은 화해를 향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행진을 따르려는 것일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하며 받았던 고통과, 자녀들에게 다시는 국가보안법의 굴레로 한 쪽 뇌와 한 쪽 가슴이 절제당하는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기독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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