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당신은 누구의 이웃이었는가?

10.4 한기총 집회를 보고

검토 완료

이기훈(1bass)등록 2004.10.07 08:40
서울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폐지논의, 5월말 이명박 서울시장의 '서울봉헌'기도, KBS의 "한국사회를 말한다", 10월 4일 한기총의 대규모 집회

이상 일련의 사건, 사안들 속에 뭔가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민하던 중 문득 '종교','기독교','하나님','예수님'이라는 단어가 나의 뇌리를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 아닌가?


서울수도 이전의 논의가 불붙었던 당시 5월 이명박 서울시장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년·학생 연합기도회'에 참석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서를 낭독한 바가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정치적 의도 인지, 아님 종교적 신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 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을지도 모른다.

"자녀여 너는 어찌하여 서울을 나에게 봉헌한다고 하느냐 나는 천지만물을 창조한 주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피조물이지 않는냐 서울은 본시 나의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왜 이렇게 갑자기 사회가 기독교와 하나님을 인용하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수도 이전 논의의 후발탄으로 등장한 것이 국가보안법 폐지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사회 기독교가 그동안 행해왔던 부조리에 대한 진단을 한 KBS의 "한국사회를 말한다" 프로그램 이후 공식적으로 기독교계 상층부는 이전 지배계층이었던 보수집단들과 같이 국가보안법 폐지 절대 불가라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이는 10.4 대규모 집회를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시킬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 우리 사회는 기독교계의 사회진출과 현실참여가 상당히 높게 나타나고 있는것 같다. 그 이유가 해방이후 지난 50여년간 사회의 주된 이슈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던 기독교가 사회적 논의의 공간이 개방된 환경에서 그들의 입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들의 현재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일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야고보소 4장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나와 우리 집단만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는만큼, 나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목숨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최대 교리라 생각한다.

우리 120여년의 기독교가 그러했는지 스스로 자문해본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 기독교는 진정 우리의 이웃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해답을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이 에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기고 또 이와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들면 내가 돌아올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1장 30-37절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저항하는 것은 어쩌면 종교이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세기 우리의 기독교가 그러하지 못했다면 먼저 그 부분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주께 참회를 하여야 할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내 이웃의 아픔이라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이웃으로 남을 수 있어야 된다. 마치 제사장처럼 힘들고 두려울때는 멀리하고 편할때에 청중에게 설교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가져서는 안될것이다.

기독교는 태생이 혁명적인 종교였다. 로마군의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창칼로 허리를 찔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행위는 혁명적인 행위라 할 수 있을것이다. 예수가 못박힌 고통과 그 의미를 기독교는 항시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며 죄사함과 용서의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기독교 현실참여의 전형이다.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