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본인 처'로 살아간다는 것

역사의 경계에도 삶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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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ysreporter)등록 2004.10.26 19:03

한국에서 '일본인 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 인권위 김윤섭

정신대와 강제징용 문제 등 식민지 시절의 숱한 피해 사례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또한 60만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사회의 차별과 역사 왜곡 문제가 대일외교의 현안으로 남아 있다. 민족 구성원 내부에서는 친일 과거사 청산 문제가 뒤늦게나마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이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서도 보듯 우리의 그릇된 인권 의식 중 지나칠 수 없는 게 자민족 중심주의다.

‘일본인 처’ 문제는 왜곡된 민족주의의 사례로는 꽤 상징적이다. 또한 인권 문제에는 선후가 있을 수 없다는 당위성도 새삼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꽃다운 나이에 한국과 연을 맺은 이들이 이제 나이 여든에 이르러 여생을 얼마 남겨 놓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느덧 한국에서 60년 이상을 살면서 할머니로 늙어 버린 이들이 얼마만큼 솔직하게 입을 열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을 추적한 최석영씨는 ‘일본인 처들은 한국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실천문학>2001년 가을)’에서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고 부정부터 하는 어느 ‘일본인 처’의 사연을 전하고 있다. 가해국 출신의 피해자, 역설적인 그들의 처지는 그들에게 피해의식을 깊게 심어 준 것 같았다.

국경을 넘어 온 사랑

일본인 처들의 출신지를 보면 일제시대에 징용을 간 조선인의 행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오케 츠네(왼쪽) 할머니와 가츠라 스즈에 할머니는 모두 훗가이도 출신이다 ⓒ 인권위 김윤섭

아오키 츠네(靑木恒, 76) 할머니는 서울 외곽에 있는 허름한 단칸방에 홀로 세들어 살고 있다. 홋카이도(北海島) 삿포로 출신으로 그의 언니 또한 한국인과 결혼해 현재 국내에서 살고 있다. 당시 농사를 짓던 그의 집에서는 탄광에 징용 온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숙을 쳤다. 아오키 할머니는 열여덟이 되던 1944년 겨울, 열 살 연상의 하숙인 김씨와 결혼한다.

“열아홉이 되면 일본 남자들은 다 전쟁터에 나가 시집가려고 해도 갈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 같은 건 없었다. 큰형부가 오키나와에서 전사해 부모님이 놀란데다가 이미 손위 언니도 한국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 신랑이 참 성실하고 점잖았다.”

이듬해 그가 만삭의 몸이었을 때 조선이 해방을 맞는다. 먼저 언니네 가족이 한국으로 들어가고, 그는 출산 때문에 그해 12월 말에야 남편 김씨와 함께 화물선을 타고 입국하게 된다.

처음에 그는 남편에게 일본에 남을 것을 설득하지만 번 돈을 조금씩 고향 형님에게 송금하여 전답 장만을 부탁해 놓은 김씨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의 시댁은 전북 진안에 있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다시 육로로 전주를 거쳐 진안에 이르는 고단하고 낯선 여행길에 올랐다.

남편의 말보다 시댁의 형편은 더 나빴다. 울도 없는 집이라 남편은 친척집에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울타리를 쳤다. 김씨가 송금한 돈은 형님이 이미 노름으로 날려 버린 상태였다. 무엇보다 아오키 할머니는 낯선 음식과 문화 때문에 입국을 후회했다. 얼룩덜룩한 꿀팥을 확돌에 갈아 지은 밥이 상에 올랐는데, 일본인이라고 자신을 죽이려고 그러는 줄 알고 남들이 밥을 다 먹은 후에야 숟가락을 댔다. 이웃들은 ‘일본댁’이라 부르며 생각보다 잘 대해 주었다.

문제는 남편 김씨였다. 절망과 울분 때문에 그랬는지 일본에서는 그렇게 점잖고 성실하던 사람이 술독에 빠져 지냈고 걸핏하면 아오키 할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그 사이 아이는 둘이나 늘었다. 전쟁 기간 3년 동안 아오키 할머니는 바가지를 들고 구걸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갓난아이인 셋째아이가 배를 곯아 죽었다. 그는 아이 시신을 직접 거둬 겨울산에 묻었다. 남편의 패악은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은 목침으로 얼굴을 때려 눈을 손으로 벌려야 했고, 코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깨졌다.

할머니는 그 길로 금산까지 걸어서 도망쳤다. 여섯 살짜리와 네 살짜리 두 아들을 둔 가출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십수 년을 머물며 일본으로 돌아갈 길을 찾았다. 한일수교가 맺어져 일본으로 갈 길이 열렸으나 김씨와 혼인관계에 있다는 문제로 다시 막혔다.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을 생각으로 다시 진안을 찾았을 때는 큰아들이 제대를 하고 돌아와 있었고, 둘째아들은 중국음식점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미 새 여자와 살림을 차려서 아이까지 두었다. 남편은 이혼해 주겠다고 했으나 아이들이 반대했다.

두 아들을 만나고 나서 그는 귀국을 포기했다. 그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막걸리집을 차렸다. 머잖아 집도 한 채 마련하고 둘째아들과 함께 중국음식점도 개업했다. 이번에는 둘째아들이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린 자신을 두고 집을 나간 어미라고 걸핏하면 아버지처럼 술을 마시고 남한테는 못하는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번에는 아들이 금고를 던지는 통에 아오키는 다시 집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녀의 나이 쉰둘이었다. 그녀는 26년째 서울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아들한테는 사는 곳을 숨기고 지낸다. 가끔 장성한 손자들이 연락을 하고 용돈도 보내 준다.

“전에는 죽으면 재라도 되어 부모 계시는 고향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아들들이 있는 이곳에 묻히고 싶다. 한국사람한테 시집와서 이쪽에서 60년 살아오니 말도 할 줄 알고 욕도 할 줄 아니 이제 무서운 게 없다. 여기가 고향이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

아오키 할머니와 한골목에 사는, 역시 같은 처지의 가츠라 스즈에 할머니(桂靜江, 86)가 있다. 그 역시 홋카이도가 고향이다. 스무 살 때 징용을 와 있던 전북 장수 출신의 이씨와 혼인했다. 이씨는 열다섯에 도일하여 15년을 일본에서 지낸 사람으로 해방이 되자 고향의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아내와 귀국했다가 여의치 않아 고향에 정착했다. 가츠라 할머니는 막노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 임실, 삼례 쪽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남편 이씨와는 30년 전에 사별했다. 둘 사이에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다섯 살 때 병사했다. 남편은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다.

“나 죽고 나면 어떻게 사냐? 무조건 일본으로 돌아가라.”

가츠라 할머니는 조카가 소개해 준 사람과 재혼하면서 서울로 왔다. 야채장사를 하던 이였는데 15년을 함께 살고 사별했다.

아오키 할머니의 국적이 한국인데 반해 가츠라 할머니는 일본 국적자다. 친정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해 일본에서 호적을 정리하지 못했다. 아직 일본 호적에 그는 미혼자로 등재되어 있다.

가츠라 할머니가 한국으로 들어올 때 친정아버지는 “한국 가서 어머니, 아버지 있다고 말하지 마라”며 내쳤다. 그동안 일본의 고향 방문을 네 차례쯤 해서 그곳 남매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돌아가서 의탁할 만한 형편은 아닌 듯했다.

가츠라 할머니는 주민등록증 대신 매년 ‘외국인등록’을 하고 여권을 소지한 채 지낸다. 일본 국적자라 선거권은 물론 생활보호대상자 자격이 되지 못한다. 한 달 10만원 내외의 공과금 납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9월 추석에는 교회에서 쌀 한 포대가 나왔는데, 그것으로 겨울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에게는 단칸방 보증금을 제외하고 수중에 꼭꼭 묻어 둔 1000만원이 있었다. 최근 그 돈을 가깝게 지내던 자영업자에게 빌려줬다가 그가 파산하고 행적을 감춰 버리는 바람에 떼이고 말았다.

“국적을 정리하면 나라에서 매달 30만원씩을 받을 수 있다는데 대사관 쪽에 알아봤더니 나 같은 경우는 국적 정리가 안 된다고 한다.”

마스모도 아기꼬(松本璋子, 80) 할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과 결혼한 경우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평양과 서울에서 자란 마스모도 할머니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씨와 결혼했다. 광복 후 친정 식구들이 모두 일본으로 귀국할 때 그는 남편을 따라 혼자 남았다.

미8군 세탁소를 운영하던 남편 박씨와의 사이에 자녀 9남매를 두었다. 마스모도 할머니는 드물게 한글에 능한 편이다. 마스모도 할머니는 해방 후 큰아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나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웠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앉아 한글을 배웠다. 담임교사의 배려가 큰 힘이 되었다. 받아쓰기 시험을 보다가 틀릴라치면 짝꿍인 아들이 가르쳐 주곤 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마스모도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쪽바리’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 운동회 같은 때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남편 박씨가 밖에서 자식을 둘이나 볼 정도로 바람을 피우자 마스모도 할머니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혼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선택을 옹호해 주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일본에 동기간들이 살지만 가기 싫다. 내 자식들이 여기에 있는데 왜 일본으로 가나? 그래도 인생을 돌아보니 사랑한다는 것, 그것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민족주의 극복이 곧 인권운동

일본인 처들의 모임인 부용회는 한때 국내 약 3000여명의 회원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400여명만 남아 있다. 사진은 1996년 일본인 사진가 하시구찌 조오지가 촬영한 부용회 회원들 모습 ⓒ 하시구찌 조오지

국내에 ‘일본인 처’들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이들의 모임인 ‘부용회(芙蓉會, 후요우카이)’에는 생존 회원 408명이 등록되어 있다. 한때 회원이 3000명에 이르렀으나 대부분 사망하거나 일부 영구귀국을 했다. 그러나 부용회 회원 자격은 개인이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더 많은 수의 ‘일본인 처’들이 사회에 노출되지 않은 채 생존해 있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용회 회원의 거주지를 파악해 보면 현재 수도권 125명, 경상도 지역 188명, 전라도 지역 71명, 충청도 지역 2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적은 한국 국적, 일본 국적, 이중(二重) 국적 등 다양하다.

1991년 자료(회원 484명일 때)에 따르면 일본 국적 164명, 한국 국적 170명, 이중 국적 150명이다. 일본 국적자들은 여전히 일본 국내의 호적에 ‘미혼자’로 남아 있다. 이중 국적자는 주민등록증이라든가 자녀들의 학교에 제출하는 서류들 때문에 가(假) 호적등록을 하여 한국 국적도 취득하게 된 경우다. 이들은 현행 국적법에서 비껴나 있다.

엄밀히 말해 현행법으로는 이중 국적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워낙 과거의 특수한 상황에서 한국에 정주하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양국 어느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국적 정리를 해주지 않았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일본인 처들의 일본 출신지를 보면 일제시대에 징용을 간 조선인의 행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홋카이도 44명, 오사카 33명, 도쿄 30명, 후쿠오카 24명, 가고시마 19명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1920년대생들로 80세 전후다.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부용회를 돕는 작은 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관광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되어 지금은 400명 정도의 후원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후원회 임원인 안양로 씨는 자신들을 농담 삼아 ‘현대판 친일파’라고 소개했다.

“이분들은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을 좋아해서 온 사람들인데 양국에서 다 냉대를 받고 있다. 자라면서 피해자 교육만 받은 우리도 이분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생각할 여지가 많아졌다. 일본에 할 말 많지만 한편으로 이분들도 그 그늘이지 않은가. 우리 사회도 이분들을 껴안아야 한다. 일본도 과거사 청산은 물론 재일교포 차별을 철폐하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를 향한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본인 처’들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주의는 블랙홀과도 같다. 애국주의와 자민족주의, 국가와 개인, 과거와 현재가 한데 뒤섞여 버리는 불가해한 체험을 하게 한다. 지금까지 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한 민족감정은 역사적 체험에서 온 저항적인 민족주의로서 정당성이 있었다.

또한 우리의 민족주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자민족주의의 색채도 강하게 띠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구별’의 시선은 곧장 ‘차별’의 시선이 되고 만다. ‘일본인 처’ 문제는 우리의 강한 민족주의의 얼굴을 되비춰 주는 거울이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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