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그리고 아줌마로 살아가기

'그녀'도 어디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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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ysreporter)등록 2004.10.29 18:18

여성단체들은 8월 13일 서울 중심가 곳곳에서 귀신 복장을 하고 '달빛 아래 여성들이 밤길을 되찾는다'란 제목으로 게릴라성 시위를 벌였다. ⓒ 우먼타임즈 김희수

에피소드 1 - 공항에서

제주도 출장 가는 길. 국내선 대합실을 배회하다가…. 흡연실은 가스실 같아서 뒤로하고 밖에 있는 택시 승강장 옆 흡연 코너에서 불을 붙였다. 한 모금 피우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저씨 천국이었다.

뭐, 어때. 미간에 약간의 주름을 잡고, 고개를 비스듬히,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얹고, 후~ 연기를 뿜어내는 맛이라니….
앞에 앉은 중년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씽긋 웃어 주었다. 아저씨, 정말 반가워요. 요즘 흡연자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거든요 하는 심정으로. 그런데…. 아저씨, 얼른 고개를 돌렸다.

# 에피소드 2 - ‘초보운전’ 딱지 붙이고

시내 운전하면서. 팍팍 밀고 들어오는 택시와 버스들. 시속 40~50km를 유지하는 내 차를 마구 추월하거나 옆에서 밀어붙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갈 길을 간다. 내 속도를 유지하면서. 초보운전 딱지 붙인 아줌마 운전자. 한번은 트렁크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달렸다. 옆 차 아줌마가 알려줘서 알았다.

바퀴가 완전히 터져 버린 것도 모르고 광화문 네거리를 달렸다. 택시운전사가 경적을 울리며 알려줬으나, 초보라고 시비 거는 줄 알고 인상을 팍 구기고 노려보았다. 으으…, 미안해요 아저씨.

이제,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 중견초보가 되었다. 양보해 주는 운전자에게 비상등도 제법 여유 있게 깜박여 주고, 한 손을 들어 답을 하기도 하며, 운전 중에 라디오와 카세트 조작도 능숙하게 한다.

흠. 그러나 오늘도 초보운전 아줌마들은 거리를 질주하는 아저씨 운전자들과 아주 미묘한 기 싸움에도 지지 않고 도로를 달린다. 표정으로 압도하면서.

# 에피소드 3 - 삼겹살집에서

서른 살이 넘으면서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밤 8~9시쯤 삼겹살집에 들어가면 대부분 아저씨들이다. 담배연기 자욱하고 얼굴들이 벌개져서 시끌벅적하다. 여자들끼리 와서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좌석은 거의 없다. 대부분 남자들 틈에 여자 한두 명 끼어 있게 마련이지.

아줌마들하고 삼겹살집에 가면 꼭 이런 일들이 생긴다.
“아저씨! 이거 파무침 이렇게 하면 맛없어! 여기다 고춧가루하고 참기름을 조금 더 넣으면 되겠다. 아셨죠?” 반찬 하나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얄밉기도 하지만 그래도 밉지 않게 잔소리 한마디하고 나면 주인장이 웃으면서 서비스 안주 몇 개 더 가져다주면서 술도 한잔 따라준다. 술기운이 오르면 아줌마,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아저씨들이 하나 둘 가게 문을 나선다. 막판엔 가게를 통으로 전세 놓은 양 주인장이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애걸할 때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다가 문을 나선다.

# 에피소드 4 - ‘그녀’가 가보지 못한 곳

하지만 아직도 ‘그녀’가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 성’을 따올 수도 있는 나라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며, 결혼한 아줌마를 ‘정식사원’으로 채용하는 회사가 많이 있는 나라에서 살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늦은 시각이라도 나갈 일이 있으면 당연히 나가는 것이라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태클을 걸면서 ‘이것이 다 너를 위해서란다'는 토까지 다는 남자가 전 인구의 0.1111% 인 나라에서 살아 보질 못했다.

그녀는 ‘아직 내가 갈 수 있는 길들이 많군’이라고 생각한다.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의 문턱을 그녀들은 수없이 많이 넘으며 살아왔으며, 이제 조금 있으면 그녀들이 들어갈 수 있는 ‘거기’는 더 많아질 테니.

그럼에도 여자들이 넘나들지 못하는 `그곳은 어디에나 있다. 금녀의 공간과 시간. 아버지의 목소리로, 공기처럼 퍼진 공포에 대한 경각심으로 굳게 닫힌 공간과 시간들. 밤거리는 그 대표적인 영역이다. 밤은 우주가 열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한밤중에 산속에 있어 본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 것이다. 별이, 달이, 하늘이 활짝 열리는 시간. 사람의 영혼도 햇빛에 가려진 낯보다 더 넓고 깊게 열리는 그곳. 밤의 어딘가에서 여자들이 자신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두려움에 떨지 않고.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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