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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에 등장하는 ‘나’는, 6·25의 전상자라는 환부를 가진 형과는 달리 ‘명료한 얼굴’이 없는 자신의 아픔을,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환부를 설의한다.
환부가 없는데도 아픔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환부가 없다는 게 도리어 환부가 될 수 있다면, 실제의 적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가상의 (외부의) 적을 만들어 그에 대응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적이라는 외부의 폭력이 존재하게 되면, 내부 단결은 공고해지고 복잡한 실재계는 적의 설정으로 더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건 좀 어째 비겁하다.
2004년도 베를린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파티 아킨 감독의 영화 <미치고 싶을 때>는 적어도 시벨의 아픔에 관해선 환부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혹은 '드러내지' 않는 말하기 방식을 택한다.
영화 전반부에 '드러나지' 않는 환부로 인한 시벨의 아픔은, 따라서 감정이입 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시벨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 - 독일에 이민한 터키계라는 민족성, 혹은 개인보다 가족을 중시하는 가족주의-은 그의 환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묘사력이 떨어진다.
구체적인 환부가 없는데도 시벨은 아파한다. 손목에 칼을 그으며 아픔을 시위한다. 드러나는 건 아픔이지 환부가 아니다. 순간 엄살 떨지 말라고 중얼거릴 만큼.
따라서 영화는 음악이라는 장치로 그 환부의 자리를 메꾼다. 피터 아킨 스스로 음악극을 만들고 싶었다는 이 영화에서 음악은 나레이션을 대신함으로써, 시벨을 이야기하고 차히트를 묘사한다.
Depeche Mode의 [I feel you]나 Ofra Haza의 [Temple of Love]같은 곡들은 오히려 나레이션보다 더욱 적나라하고 적확하다. 환부를 묘사하기 위해 말들을 나열하기보다는 음악이라는 디오니소스적인 청각장치로 그들의 환부에 골몰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시도는 성공적이다.
그러나 과도한 음악 사용이 다소 스타일에 치중한다는 느낌도 들게 하지만, 중간중간에 삽입된 오케스트라처럼 영화 전체를 오히려 하나의 음악극으로 이해한다면 무리 없을 것 같다.
OST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감정과 영화에 흐르는 전반적인 정서를 연상시킬 수 있을 만큼, 영화와 음악은 밀착되어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건이 제시되고 그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이 관객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것이 되자, 영화 후반부에선 음악의 과다한 개입이 필요치 않게 된다.
사랑은 나를 살릴 수 있다 생각했지만, 사랑은 나를 죽인다. 시벨은 알았을 것이다. 사랑이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혹은 '사랑'이라 포장된, 대상이 소멸된 맹목적 감정이 당신을 미치게 할 것이라는 걸.
독일로 이민 온 터키계인 시벨(시벨 케킬리 분)은 우연히 병원에서 같은 터키계인 차히트(비롤 위넬 분)를 만나 자기와 위장결혼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시벨에게는 그 무엇보다 구속을 상징했던 집을 떠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차히트 앞에서 손목을 그으면서까지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린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 척박하게 살던 차히트는 결국 시벨과 결혼식을 올리고 섹스없는 동거를 시작하지만,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는 시점에서 그는 살인사건으로 교도소에 간다. 그렇게나 사랑했던 차히트가 3년 후 다시 돌아왔을 때, 시벨은 그와 함께 떠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차히트가 교도소를 나와 친구와 밥을 먹는 장면에서 그의 대사만큼 이 영화 혹은 '사랑'이라 호도되는 것들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건 없다.
"그녀가 있어서 감옥생활을 견딜 수 있었어."
이때 시벨은 이미 없고, '그녀'로 지칭되는 3인칭만 남는다. 시벨이 아닌 '그녀', 혹은 차히트가 아닌 '그'라는 3인칭에 대한 환상들이 사랑을 지탱한다.
그들은 사랑한다고 ‘믿고’, ‘느꼈’지만, 그건 감정적인 공모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자들은 공범이 되어야 마땅하다. 각자의 상황이 빚어낸 상상 속 사랑의 감정은 실제 공모의 시도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다. 시벨은 그걸 알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몸 속 깊이 안은 차히트의 몸을 통해, 혹은 3년이라는 정적의 시간을 거쳐.
음악, 영상, 배우들의 흥미로운 조화에도 불구하고(비롤 위넬의 발견은 개인에게 기록적이다) '자유'라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가벼운 고찰은 좀 거칠다. 시벨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터키계라는 민족성, 명예를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너무 얼기설기 배치되고, 또한 광기, 자유, 구속을 묘사하는 방식이 진부하다.
처음부터 자유를 추구해야할 쪽은 시벨이 아니라 오히려 차히트였던 것 같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 자유를 얻은 쪽 역시 차히트인 것처럼 보였다. 자유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시벨만이 보였다. 내적 기획에서 출발한 자유가 아닌, 가족집단의 반대급부로 등장한 자유같았단 말이다.
사랑과 섹스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 약을 하고 맘에 드는 사람과 쉽게 섹스할 수 있는 것. 그게 과연 자유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특히 섹스에서만큼은 일부일처제 혹은 다른 윤리상의 이유로 인간들 자신의 리비도가 충분히 분출되지 못해왔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엄마가 딸에게 '너는 되도록 많은 남자를 사귀어라'라는 식으로 (물론 책임이 따르는) 많은 섹스를 권장하고, 또 그게 쿨한 것처럼 인식되는 건, 프로이트 이후 성적억압에 대해 지나치게 강박관념을 받았다는 입증이다.
이미 존재하는 '성적 자유로움에 대한 판타지'는 성향 혹은 단지 성향이 아니라 운동의 본질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윤리'니 '도덕'이니 '구조'니 하는 말로 깎아내리면서 득세한다. 왜 그렇게도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버리고 억압받는 자의 위치에 상정시키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과도한 피해의식들이 아주 춤을 춘다. 다 프로이트 때문일까?
광기에 대해 지나치게 일반적인 해석 혹은 러브스토리를 제시하는 교과서적인 텍스트 <미치고 싶을 때>라는 제목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상상하고 극장에 들어갔지만, 결코 배반하지 않는 그 점이 참으로 순진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충분한 러브스토리이지만, 부분적으로는 개개의 설정과 해석이 다소 신선함을 잃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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