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monism 2. 생명(生命)

- 제3시대론 -자본주의 이후의 철학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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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종(iuda)등록 2004.12.04 15:25
목차

Harmonism
- 제3시대론 -자본주의 이후의 철학과 혁명

Ⅰ. 철학 & 총론
1. 진보
2. 생명
3. 시대
4. 미래

Ⅱ. 이론
5. 정치
6. 경제
7. 사회문화
8. 교육

Ⅲ. 실행
9. 통일
10. 혁명


2. 생명(生命)

나는 이제 우주(宇宙)와 생명(生命)의 구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주와 생명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정의(定議)를 내리는 것은 이 정의(定議)가 Harmonism 철학(哲學)과 이념(理念)의 시작이며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한 가지 정의하고자 할 것은 과학(科學)이다. 과학이란 진리(眞理)인가? 사실(事實)인가? 추측(推測)인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과학이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추측하는 자연현상이다. 철학이란 과학에 근거한 인간의 상상이다.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은, 상상하는 자의 과학적 상식을 벗어나 사유할 수 없다. 모든 상상은 사실에 기인한다.

창세기를 쓴 시대의 사람들은 하늘을 윗물, 바다를 아랫물이라 하였다. 하늘빛과 바다빛이 비슷하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하늘의 푸른창공은 바다처럼 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더군다나 아득한 수평선에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데...... 이 당시 사람들에게 빛의 산란 효과에 의하여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는 현대의 과학적 사실은 무의미한 괴변에 불과할 뿐이었을 것이다.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던 시대에는 그것이 과학이다. 그 과학적 사실에 의하여 당시 사회 지도 이념인 신학(神學)이 규정되었다. 여기에 도전하는 것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나는 가끔 유물론(唯物論)을 생각해 내고 너무나 기뻐하였을 마르크스를 상상하곤 한다. 유물론은 당시 최첨단 과학인 뉴턴의 이론들에 일치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거울을 통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사(現代史)의 가장 커다란 변화(變化)와 혁명(革命)을 유도한다.

내가 이 글에서 우주(宇宙)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상상(想像)이다. 나는 과학적인 사실을 증명하고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에 기초한 철학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상상을 읽는 독자가 받아들일지 거부할 지는 독자의 자유이다. 다만 바라고자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이 융화되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과학과 그에 따른 철학이 보편화되기를 바랄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人類)의 다음 세계(世界)를 열어가는 혁명(革命)의 시작이다.

- 우주(宇宙)

나는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그 시작은 어떠했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자 한다.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구성이나 물질과 에너지의 작용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과학자들의 몫이고 나는 이 글에서 우주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철학으로부터 생명과 인류의 삶과 미래를 설정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폭발(Big Bang) 이 후 우주는 세 개의 독립된 세계로 나누어진 것 같다. 그것은 물질(物質)의 세계와 에너지(Energy)의 세계와 정기(精氣)의 세계이다. 물질계와 에너지계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은 이제 어느 정도는 진실에 근접하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정기(精氣)의 세계에 대하여는 우리는 아직도 아무런 과학적 측량도구 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주(宇宙)의 기본 법칙은 보존(保存)과 순환(循環)이다. 우주 안에 속하여 있는 어떤 것도 우주 밖으로 탈출 할 수는 없다. 만약에 어떤 물질이 우주를 탈출하였다면 탈출한 그 곳 또한 우주이다. 이처럼 우주는 보존되어 있고, 각각의 세계 즉 물질계와 에너지계와 정기계는 각각 보존된다.
또 하나의 가정은 우주는 충만(充滿)하다는 것이다. 우주에 빈 곳은 없다. 만약 우주의 어느 곳이 비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의 부분이 아니라 우주가 아닌 것이다.

물질계(物質界)는 다른 물질과 상호 작용하는 물질인 반응물질(反應物質)과,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물질인 비반응물질(非反應物質)로 분리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현재 과학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것은 반응물질의 부분이다. 비 반응물질을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암흑물질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과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우주의 충만성에 비추어 반응물질의 빈 곳을 비 반응물질이 채우고 있다고 판단하여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우주의 공간이나 반응물질의 사이사이를 비 반응물질이 채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수(數)의 우주(宇宙)인 복소수(複素數)를 실수(實數)와 허수(虛數)의 합(合)으로 보듯이 우주의 물질계는 반응물질과 비 반응물질의 합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물질들이 우주 안에서 보존되며 순환한다. 물질(物質)의 합(合)은 곧 우주(宇宙)이다.

에너지(Energy)는 어떤 물질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물질의 상태를 나타낸다. 에너지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다른 물질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동(動)에너지와 그 물질에 기본적으로 내포되어 다른 물질에 작용하지 않는 정(停)에너지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에너지는 동에너지이다. 동에너지의 이동은 에너지가 물질을 이동하는 현상이다. 소리에너지가 우주의 진공을 이동하지 못하고 빛에너지는 우주를 이동하는 것은 우주를 채우고 있는 물질이 소리에너지는 흡수하지 못하고, 빛에너지는 흡수하기 때문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리가 소리를 듣는 것은 그 소리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공기, 또는 어떤 물질의 떨림을 느끼는 것이지 소리에너지 자체를 듣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을 보는 것은 그 빛이 반사되는 어떤 물질을 보고 있는 것이지 빛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핵융합이나 핵분열은 물질의 정에너지가 물질이 바뀌면서 그 일부가 동에너지로 방출된 현상이다. 핵반응에 있어서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하는 현상은 핵반응 전 물질이 반응 후 물질과 질량을 측정할 수 없는 비 반응물질로 변환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수소 2개에 포함된 에너지가 헬륨 한 개에 포함된 에너지로 전환하면서 남는 에너지가 핵에너지로 방출된 것이다.

질량계 : 수소 + 수소 = 헬륨 + 비 반응물질
에너지계 : 수소 에너지 + 수소 에너지 = 헬륨에너지 + 핵에너지

질량보존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단순히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다 큰 원리에 모순된다.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 교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에너지란 물질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에 측량할 수 있는 질량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될 문제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물질은 측량할 수 있는 질량이 있는 까닭에 측량할 수 없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상상이다. 우리 자신이 측량 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에너지계(界)는 물질이 내포한 정(停)에너지와 물질 사이를 이동하는 동(動)에너지로 구분되며 이 에너지는 우주 안에서 보존되며 순환한다. 이 두 에너지의 합이 전체 에너지 즉 우주이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동차라는 물질과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선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자가 필요한 까닭이다.
우주를 물질과 에너지만으로 생각한다면 우주는 그저 정해져 있는 시나리오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최초에 어떤 원인에 의하여 우주가 시작되고, 그 원인이 결과가 되어 새로운 원인을 낳고, 또 그 원인의 결과가 반복되면서 정해져 있는 최후를 향하여 가게 될 것이다. 그 과정과 결과를 신(神)이라는 특정된 의지(意志)가 설정해 놓았다는 것이 예정론(豫定論)이며, 신의 개입을 부정하는 것이 유물론(唯物論)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모순은 없을 듯하다. 이러한 인과론(因果論)적인 사고는 생명(生命)에게 자유(自由)를 허락하지 않는다.
위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모든 물질은 물질인 동시에 에너지이므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이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독립되어 있으므로 어떤 일정한 조건을 주어도 그 결과가 항상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입자의 조건을 고정시키면 에너지인 파동이 유동적이고 에너지의 조건을 고정시키면 입자가 유동적이다. 미래(未來)가 결정(決定)되어 있는 고전역학(古典力學)과는 달리 미시세계(微視世界)를 다루는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는 물질의 미래는 확률적(確率的)이다.

나는 이제 여기에서 아직까지는 비과학적인 요소인 정기(精氣)를 삽입하고자 한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동차라는 물질과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에너지와 자동차를 조종하는 사람이 필요하듯이, 모든 물질(物質)은 입자(粒子)인 동시에 에너지인 파동(波動)인 동시에 의지(意志)인 정기(精氣)이다.

정기(精氣)란 물질의 의지이다. 물질도 여러 가지 물질이 있고, 에너지도 여러 가지 에너지가 있듯이 정기 또한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크게 모든 물질에 내포되어 있어 다른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비활성정기(非活性精氣)와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활성정기(活性精氣)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활성정기는 살아있는 생명체에서 활동하는 정신(精神)과 생명체를 떠난 영혼(靈魂), 물질의 잉여정기(剩餘精氣)와 영혼의 결합체인 귀신(鬼神)종류, 종교적이고 집단적인 염원체(念願體)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생명(生命)의 시작(始作)은 육체(肉體)를 이루는 물질(物質)과 에너지(Energy)와 정기(精氣)가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마침인 죽음은 육체와 에너지와 정기의 흩어짐을 의미한다. 우리가 죽어서 천당을 가느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은 영혼의 흩어짐에 있어 우리가 살아있을 때 염원했던 염원체에 흡수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물질(物質)은 입자(粒子)와 에너지(Energy)와 정기(精氣)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을 입자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 입자의 미래는 고정적(固定的)이고, 에너지인 파동까지 고려한다면 그 물질의 미래는 확률적(確率的)이다. 그리고 여기에 생명체의 정기가 합쳐질 경우 그 입자의 미래는 의지적(意志的)이다.

생명체(生命體)는 정기(精氣)의 고도의 집합체인 정신(精神)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정신의 활동은 생각이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작게는 우리 육체의 방향성을 주고 다른 생명체와의 교류를 하고, 생식행위를 통하여 개체를 증식, 유지하고, 넓게는 무한한 상상을 통하여 다양한 생명활동을 한다.

생명체의 정기인 정신은 모든 생명체에게 삶의 방향성을 주지만,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의 정신의 폭은 문명을 이루고 교육을 통하여 대물림되며 확대 재생산되는 인간 정신의 폭과는 그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고대 인류로부터 인류는 생명체 이외의 정기에 대하여 인식을 하였고 그것은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관습을 낳았다. 생명체 이외의 정기를 나는 신(神)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눈으로 빤히 보고 있는 물질의 세계조차도 아직까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우리가 신의 세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극도의 상상력을 동원한 부적절한 추측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신에 대한 규명이 우리 인류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열쇠가 되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신(神)은 어디에 위치(位置)하는가?
이것은 신의 존재(存在)에 대한 물음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 번 우주를 보자.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전체인 우주의 내부에 있어야 한다. 우주는 보존되고 우주는 충만한데 우주 밖에 있는 무엇은 의미가 없다.

나는 물질을 반응물질과 비 반응물질로 나누어 이야기 하였다. 이것은 물에 소금이 녹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에 소금을 넣으면 소금이 물속에 골고루 녹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물이 소금을 녹일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이 상태를 포화 상태라고 한다. 포화 상태를 지났는데도 소금을 더 넣으면 소금은 알갱이가 되어 눈에 보이게 된다. 알갱이인 소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에 녹아있는 소금은 인식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이온화되어 자기를 담고 있는 전체의 물에 골고루 퍼져 있는 까닭이다. 알갱이인 소금들에게 소금의 질량을 측량하라고 한다면 알갱이로 되어 있는 소금의 양만 측량할 할 수 있지 전체 소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에 녹아 있는 소금의 양은 측량 할 수 없다.

우주에 물질이 녹아있다. 물질은 물에 소금이 녹아 있듯이 우주 전체에 꽉 차게 골고루 녹아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들의 집단은 과포화 되어 녹지 못한 알갱이들이다. 우주는 충만하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라.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의 세계는 우주 과포화 이 후의 물질인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에너지는 과포화 이후의 에너지이다. 또한 우리가 인지하는 정기는 과포화 이 후의 의지체이다.

물질은 물질인 동시에 에너지이며 정기이다. 이 세 개의 독립된 세계가 서로 서로 연관되어 움직인다. 이제 다시 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살아있는 생명체의 의지는 생명체 안에 존재한다. 우리의 육체는 반응물질과 비 반응물질의 합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육체안의 반응물질과 비 반응물질에 걸쳐있다. 그렇다면 생명체 이외의 의지 예컨대 죽은 영혼, 귀신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까? 만약에 반응 물질에 걸쳐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지할 것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 비 반응물질에 위치해야 할 그것들이 반응물질로 일시적으로 옮겨 와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건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적으로 비 반응물질에 존재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육체 내에 존재했던 영혼이 육체를 떠나 비 반응 물질로 옮겨짐을 뜻한다. 정상적인 죽음이라면 이미 그 영혼의 기가 작아져 있겠지만 아무튼 이 혼이 정기의 세계로 서서히 녹아가는 것이다.

그 공간이 제한되어 있는 영혼과는 달리 염원체인 신의 세계는 상대적으로 무한한 공간을 가진다. 신의 세계는 그 신의 고유한 영역과 그 신을 따르는 인간의 염원에 모여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예수의 세계를 믿는 사람에겐 예수의 염원체에 그를 믿는 신자들의 영혼의 염원이 모여 구성된다는 의미이다. 이 연결된 끈에 의하여 기도와 통교가 이루어지고, 사 후에 일반적인 영혼의 흩어짐과는 달리 그가 믿던 염원체내에 흡수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신과 통교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통하여 통교를 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의지에 의하여 신의 모양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차이가 같은 근본을 가진 종교조차도 개별화 집단화 과정을 거쳐 마치 서로 다른 종교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사악에 의하여 이슬람교와 유대교로 분리되었고, 유대교는 예수의 시대에서 다시 기독교로 분리되었으며 기독교는 다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서방교회인 로마가톨릭교회는 루터와 캘빈에 의해 다시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분리되고 이는 또 다시 현재의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분리된다.

현대 세계의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 유대문명은 결국 한 하느님이라는 염원체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신의 전쟁과 같은 인간의 전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신을 바라볼 때 나의 의지라는 거울을 통하여 보게 된다. 나의 의지가 순수하고 깨끗하여 맑은 영혼을 지녔다면 신은 나에게 올바로 보이겠지만, 나의 의지가 나의 욕심에 일그러지고 온갖 추악(醜惡)에 오염되어 있다면 신의 모습 또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또한 내가 추악하지 않더라도 내가 신을 보는 거울이 일그러져 있다면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신의 모습은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그 일그러진 신의 모습을 우리는 바른 모습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신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우주 바깥에?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아니다. 그는 3차원 현재 공간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 우리의 우주는 물질인 동시에 에너지인 동시에 정기이다. 이것은 각각 독립적으로 보존 순환되며 우주 안에 충만하다. 물질은 마치 소금이 물에 녹아있듯이 우주의 전체 공간에 녹아 있으며 녹지 않은 잉여물질이 곧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이다. 녹아있는 물질을 비 반응물질, 녹지 않은 물질을 반응물질로 정의하였다. 에너지는 물질에 고유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정에너지와 서로 작용하며 이동하는 동에너지로 구분하였으며 태양과 같은 핵반응은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물질 안에 내포되어 있는 에너지가 일부 비 반응물질로 전환되면서 내뿜는 에너지라는 것을 말하였다.

질량계 : 수소 + 수소 = 헬륨 + 비 반응물질
에너지계 : 수소 에너지 + 수소 에너지 = 헬륨에너지 + 핵에너지

정기계는 모든 물질에 내포되어 방향성과 의지가 없는 비활성정기와 방향성과 의지가 있는 활성정기로 구분하였으며, 활성정기는 생명체내에 존재하는 의지와 생명체 외에 존재하는 의지로 구분하였고, 생명체 내의 의지의 위치는 생명체 내의 반응물질과 비 반응물질에 걸쳐있으며, 죽은 후에는 비 반응물질로 옮겨간다는 것과, 생명체 외의 의지에 대하여 특히 염원체인 신에 대한 부분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이 의지가 서로 통교한다는 것과, 각각의 의지의 영향으로 서로 다르게 보인다는 이야기까지 하였다. -

- 생명(生命)

나는 이제 이 글의 주제인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반응물질의 모임인 별들이 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특수한 부분이듯이, 생명은 반응 물질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위치에 기적적으로 존재하는 매우 특이한 상황이다. 생명은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그 생명체가 존재하는 공간을 의지적으로 변화시킨다.

우주를 물질인 입자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고정적이다. 즉, 정해진 규칙에 의하여 정해진 대로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에너지 즉 파동의 입장을 첨부한다면 그 물질은 확률적이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확률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의지를 합치게 되면 그 물질의 미래는 의지체의 의지에 의하여 변한다. 물질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물질의 미래는 의지체에 달려있다. 그것이 곧 대자유(大自由)이다.

생명(生命)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인간 생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의 생명은 한 정자와 한 난자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만남이 최초의 작용에 의하여 결합되고 분화되면서 생명은 형성된다.

생명의 씨. 정자와 난자의 만남. 그것은 정자와 난자라는 반쪽 유전물질의 만남인 동시에, 생명을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체의 만남이다. 생명의 씨를 간직한 정자와 난자라는 2개 의지체의 결합에 의하여 생명은 시작되고, 이 후 물질과 에너지와 의지의 공급과 배설과정을 거치면서 한 생명체는 성장한다.

내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무한대의 우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서로 만나 나를 형성할 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는 단순한 확률적(確率的) 기적(奇蹟)이 아니라 의지적(意志的) 필연(必然)이다.

나는 존재(存在)하고자 하여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存在者)에 의하여 존재(存在)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명의 의지(意志) 안에는 존재자(存在者)의 의지(意志)가 존재(存在)한다. 의지적으로 내가 곧 그이고 그의 부분이 곧 나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곧 그이고 그가 곧 우리이다. 그는 우리 전체(全體)이다.

생명(生命)의 목적(目的)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자유(自由)를 만끽(滿喫)하는 일이다. 비생명체에게는 자유가 없다.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나 기껏해야 확률적 변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에게는 자유가 있다.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있다. 그대는 삶을 결정하는 주체자(主體者)이다. 삶의 자유를 만끽하라. 그것이 그대를 존재시켜준 존재자의 의지이며 명령이다.

우주를 보라. 저 끝없는 우주 공간에 생명이 있는 곳, 아직까지는 우리뿐인데 너무 놀랍고 너무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에게는 생명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 우리는 정해져 있는 시간동안 이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 향유할 권리가 있다.

생명은 물질과 에너지와 의지의 기적적인 결합체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은 다른 생명체에 비하여 그 의지가 월등하게 높은 위치에 존재하므로 보다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유 활동의 결과가 문명(文明)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명(文明)이 인간의 자유(自由)를 다시 구속(拘束)한다.

삶을 존재자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하라. 그대를 구속하는 문명을 재구성하고, 문명이 그대 자유의 도구가 되게 하라. 이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 Harmonism의 목표이다.

삶은 소유(所有)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經驗)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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