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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11번째 작품 <빈 집>은 '늘 그렇듯' 영화제 몇관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세간에 알려졌다. '창녀/성녀'의 이분법의 구도 안에서 여성의 희생을 통한 남성의 구원을 다소 불쾌한 느낌을 의도하고서 노래하던 예전 작품들과는 달리, 그 측면에서 <빈 집>은 확실히 다른 인상을 선사한다. 그 이유는 재희(본명 이현균)라는 남자주인공의 소위 '남성적이지 않은' 성향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신비주의'때문이기도 하다.
남자(재희 분)는 음식점 전단지를 각 집 열쇠 구멍에 붙인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찾아갔을 때 전단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집은 빈 집일 것이다'라는 아이디어에 착안해 남자는 빈 집에 들어가 비어 있는 그 집안을 채운다.
절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집의 빨래들을 모아다 손수 손빨래를 하는가 하면 방청소에다 밥까지 차려 먹고선 설거지도 깔끔하게 하고 그 집 식구들의 잠옷을 입고 잠에 든다. 그러다 어느 빈 집에서 여자(이승연 분)를 알게 되고, 그가 남편의 폭력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여자는 이 남자와 동행한다.
비교적 매우 단순명료한 메타포다. 비어 있는 집마다 들어가 그 집을 채워주는 남자. 이 남자는 비어 있는 '여자의 집'에도 들어가 그 여자를 채운다. 김 감독의 장점은 무엇보다 미쟝센을 훌륭하게 다룰 줄 안다는 것인데, '빈 집'을 찾아다니는 설정에 알맞게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은 미쟝센의 욕구를 충실히 반영한다.
원룸식 주택에서부터 북촌 어느 부유한 기왓집, 그리고 다 쓰러져가는 다세대 주택까지. 형태의 다양함 만큼이나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집합, 그리고 그와 접합하는 남자와 여자.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소재들이라는 건 명백하다.
이 영화를 보려고 마음 먹었을 때부터 결심한 것이 있다면, '김기덕'이라는 이름 석 자를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었다. 김기덕에 대한 편견 없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서부터 과연 감독에 대한 고려 없이 작품만을 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감상일까, 라는 생각까지. 실제적으로 그의 이름을 지우고서 영화를 보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낡은 다세대주택에 혼자 살고 있던 노인이 피를 토하며 죽은 것을 여자가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이들의 '빈 집 찾기'는 막을 내린다. '제사만 안 지냈을 뿐이지 친자식보다 더 정성스레 장례를 치른' 여자와 남자는 아들 부부의 방문으로 경찰에 넘겨지고, 여자는 폭력남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남자는 구치소에 수감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다른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인간이 비어 있을 수 있을까'
남자는 교도소 독방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연습을 시도한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가 체중계에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복선과도 같다. 교도소 간수를 상대로 처음엔 인간의 시야의 180도 바깥에 서 있음으로 해서 '사라지기'를 시도하다 출감할 때쯤에 이르면 '완전한 비어있음'에 도달하게 된다.
하이틴 잡지 모델 출신인 재희의 얇은 몸과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 그리고 시종일관 말이 없는 그의 태도는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더욱 이 남자의 '신선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는 결국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단계에까지 다다르고, 여자를 찾아간다.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을 꼽으라면,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가 영화에서 처음으로 입을 떼는 장면이다. 집에 누군가 들어왔음을 눈치채고 골프채(이 영화에서 골프채는 주요한 모티프이다)를 휘두르는 남편, 결국 그는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고 침대에 눕지만 여자는 남자의 그림자를 발견하고선 조용히 거실로 나간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발견하고선 미소를 짓는다. 수상해 하는 남편이 따라와 잠을 안 자고 무엇하냐기에 여자는 처음으로 말을 하는데 그 말은 바로 "사랑해요"이다. 감격한 남편이 여자를 끌어안고 여자는 팔을 길게 뻗어 남자의 손을 잡고 이내 키스한다.
이 영화가 김 감독이 만든 것이 아니라면 좀 덜 불쾌했을까. 아니면 그와 같은 가정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든 결론은, 그가 영리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영화는 잘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만큼, 선/악 구도가 뻔하고 남편이나 형사는 위악스러우며 메타포가 지나치게 흘러 넘친다.
시종일관 흐르는 묘한 음악과 절제된 색감과 선(禪)적인 주제는, 사실 의도가 매우 수상하리만치 동양적이어서, 처음부터 해외영화제 출품을 의도하고 만든 작품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구식 오리엔탈리즘을 교묘히 이용했다고 할까나. 남자는 독방에 수감된 채 공(空)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는 도를 닦는다. '왜 사냐건, 웃지요'의 그 웃음만큼이나 여운을 남기는 표정과 함께. 남자의 길고 가느다란 팔은 동양식 무예를 연상시키듯 허공을 휘젓는다.
종영된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에로배우 한시연(김민정 분)을 '배우'로서 처음으로 영화에 등용해준 그 감독이 실제로 김 감독을 모델링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떠돈 적이 있었다. 그때 한시연이 왜 자기를 주인공으로 쓰냐고 묻기에 기획사측에선 '감독님이 한시연씨의 눈빛에서 처절한 느낌이 난대요'라고 했던 대사가 있었다.
위안부 누드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이승연을 주인공으로 쓸 때, 그것도 남편의 폭력으로 한없이 무기력하기만한 여자를 연기하게끔 이승연을 선택한 김 감독의 안목은 어찌나 탁월한지. 가여운 척 멍하게 응시하는 이승연이나 그걸 의도한 김 감독이나, 보고 있는 나로선 실로 역겨웠다.
<키키> <에꼴> 같은 십대 잡지에서 자주 봐오던 얼굴이 재희라는 가명으로 영화에 등장하자 다소 놀랐다. 대사가 한 마디도 없어서 연기를 실제로 얼마나 잘 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할 자체만 보자면 괜찮은 캐스팅이었던 것 같다. 그치만 요새 젊은 남자배우들이 눈빛연기는 뭐 알아서 잘 하는 걸로 봐서, 그와 체격이 비슷한 다른 배우였어도 큰 상관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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