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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계적인 교회를 세운 모 목사가 ‘대형 교회 비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면서 “당신도 한번 대형 교회를 세워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반대 입장을 표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 근거나 타당성의 여부를 논하기 이전에 ‘너도 한 번 나처럼 세워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들을 귀 없는 이들에게 경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인가 어떤 교회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30여 개의 위성 교회를 세워 본 교회의 예배 실황을 위성을 통해 중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런 프로젝트를 계획하는 이들에게 ‘과연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物神)에 예속된 신학을 바탕으로 목회를 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대형화를 비판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목적이 대형화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나쁘다고 하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교회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커지고 싶어 하는 것’은 작은 것에 대한 컴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 작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논리다. 작은 것에 대한 아픔이 있기 때문에 커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점점 커지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대형 교회치고 가난한 교회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부자가 예수님을 등지고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부자 교회들이 피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쓰나미로 인해 온 인류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한 대형 교회의 목회자가 설교 시간에 “이번 쓰나미는 예수를 믿지 않은 결과”라고 했다고 한다. 대형 교회라면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예배에 참여할 터인데, 목회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수많은 교인들이 이런 비 그리스도적이고 반 성서적인 설교에 ‘아멘’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목회자만 문제 삼아서는 안된다. 그런 메시지해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면 신자들의 반성의 몫도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할 때는 교회 안에 꼭 있어야 할 요소들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대형 교회인가를 진단하는 기준이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는 할 수 있어도 가난한 이들의 억울함과 한맺힘에 함께 하지 못하는 교회는 대형화를 지향하는 교회로 볼 수 있다. 인권이 억압당하고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강단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지 못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외면하고 교회의 성장을 이유로 침묵하는 교회일 것이다.
사랑과 나눔, 평화를 세습하는 교회 돼야
한국의 대형 교회가 비판받는 결정적인 원인은 교회의 대형화가 본질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친 물신적이고 반 그리스도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라면 ‘동네 수퍼를 집어삼키는 대형 마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슬픔을 당해 절망하는 이웃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 목회자를 보면서 하나님조차 부끄러워 얼굴을 숨기셨을 것이다.
모두들 크고 좋은 것만을 지향하는 시대에 우리 교회만큼은 작아도 정이 있고, 말씀이 살아 있고 나눔이 있는 교회가 됐으면 한다.
큰 교회를 세습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나눔과 평화를 세습하는 목회자, 돌봄과 위로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올바른 길 안내를 위해 모든 교회가 서로 협력한다면 어떤 이들이 대형 교회라고 비방하고 또 대형 교회의 목회자를 비난하겠는가?
성장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동력이다.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이 성장해야하는지 봄을 맞는 계절에 땅 속 씨앗이 되어 묵상을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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