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 매화 핀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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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일(jinmun)등록 2005.03.02 16:23

통영 미륵도 달아공원에 활짝 핀 매화 ⓒ 윤영숙

시인 김수영은 경주의 어딘가에 세워진 관공서에서도 잘 모른다던 청마의 시비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다. 결국 제자를 통해 알고 불국사 가던 길가에 세워진 시비를 찾아갔다. 청마의 시비 앞에서 시인은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한다. 다시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김수영은 일년 후에 교통사고로 생을 마친 일화며, 신 소장도 청마의 시비 앞에 한 시간 이상 혼자 앉아 있었던 옛 기억을 회상하며 들려주었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나는 행복하였네라.” ‘행복’ 일부분

신 소장이 낭송하면서 우리의 통념상 결혼한 지식인이 다른 연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 이 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지만 분명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어 통영은 일대는 중앙기상대에 의하면 일년 중 250일이 맑기 때문에 날씨가 가장 좋은 지방이며, 통영은 통제영에서 유래하여 통영으로 불리다 충무시에서 다시 통영시이라는 지명을 쓴다고 설명해 주었다.

통영에 도착해 충렬사로 향했다. 충렬사는 조선 선조 39년(1606년) 제7대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으로 이 충무공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이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하여 내삼문, 외삼문, 중문, 정문, 홍살문 등 다섯 개의 문이 있다.

중문 안에는 향사 때 제수를 준비하던 동재, 서재가 있고 외삼문 안에는 사무를 관장하던 숭무당과 인재를 양성하던 경충재가, 외삼문 좌우에는 충렬묘비를 비롯한 6동의 비각이, 외삼문 밖에는 1988년에 복원한 강한루와 전시관 등이 있다. 외삼문에 걸려 있는 "충렬사(忠烈祠)" 현판은 1663년에 현종이 사액한 것으로 글씨는 송준이 썼다고 한다.

세계 해전사에 가장 빛나는 노량해전을 비롯해 34번의 해상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룬 인물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삶은 너무 불행했다.

장군은 녹둔도에 근무하던 시절 아버지의 임종도 수십일 후에 알고 아산으로 간다. 팔십이 넘은 노모가 아들 이순신을 만나려 아산으로 향해 오다 세상을 뜬다.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전쟁터로 떠나는 비통한 심정을, 또 아들 왜군에게 죽임을 당했음을 알고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는데 하며 통곡의 마음도 <난중일기> 쓰던 마음을, 나는 오늘 충렬사에 와서 장군의 나라 사랑한 마음을 깊이 되새겨 본다.

통영항에서 남망산 조각공원 중턱으로 올랐다. 문화관을 앞에 통영항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시선이 향하는 위치에 청마의 시 '旗ㅅ발'이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의 標ㅅ대 끝에 / 哀愁는 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일행 중 한 아주머니가 '깃발'을 낭송했다.

나는 전망대 수향정에서 한산섬을 살펴보고 내려와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아래 단기 사천이백 팔십팔년에 세운 이충무공 한산대첩비를 자세히 보았다.

통영오광대', '남해안 별신굿', '승전무' 설명해 놓은 간판. 통영무형문화재전수회관과 보존협회에 건물 앞에서 통영의 어머니와 같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박경리, 유치환, 유치진 같은 문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음악가로 꼽히는 윤이상을 낳은 근원적인 힘은 통영 저 바다에서 나온 것이다.

윤이상은 죽기 전까지 간혹 일본에 들르는 기회가 있으면 배를 타고 남해안 근처로 접근해 가면서까지 고향인 통영 앞바다를 먼발치로 보려고 애를 쓰며 그리워했다. 윤이상은 살아생전에 끝내 고향 통영에 오지 못했다.

도대체 조국은 무엇인가, 조국을 사랑했던 음악가는 조국 땅을 그리워했지만 분단을 핑계로 그를 이국땅에서 세상과 작별한 아픔은 준 이들은 누구인가. 그의 아픔을 누가 어루만진단 말인가! 말로만 통일이 아닌 하나 된 조국은 언제 될 것인가! 이 땅에 남은 우리는 진정한 조국 통일에 대한 성찰과 실천하는 행동을 보여야 하리라!

이어 세병관은 들려 옆에 세워진 공적비에서 신정일 소장이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영의 통제사로 와 있던 벼슬아치가 정승으로 벼슬이 올라 통영을 떠나게 된 것을 섭섭히 여겨 "강구안 파래야, 대구 ․ 북장어 쌈아, 날씨 말고 물 좋은 너를 두고 정승길이 웬 말이냐"라고 탄식했다는 내력, 또 일제 36년의 수탈의 시대에는 일본인들이 풍부한 수산물과 좋은 날씨를 찾아 일본인들이 몰려와 살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통영의 달아공원을 향하면서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10여 분 이상 걷자 어느 할머니가 굴 껍질을 손질하고 있었다. 해녀 두 사람이 바다 속에서 자맥질을 하는 모습, 푸르러 시린 바다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미륵도로 향하다 만난 바다 ⓒ 윤영숙

미륵도 달아공원에 올라갔다. 공원에 핀 매화를 보고 향내음도 맡아보았다. 공원 꼭대기에서 한려수도의 여러 섬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미항.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달아공원에서 당포성지로 향해 걸었다.

미륵도 달아공원의 매화꽃 ⓒ 진병일

당포성지에서 장군봉을 향해 갔다. 20여분 걸어 장군봉 꼭대기에 있는 제당에 도착, 제당 안의 영정(작자 미상의 조선시대의 영정과 많이 닮은 모습)은 충렬사에 있는 영정(1952년 장우성이 그린 아산 현충사)과 달랐다.

장군봉에서 푸르고 푸른 한려수도를 내려다보았다. 임진년(1592)부터 이 곳에서도 당포해전을 치룬 백성들의 고통은 이 시린 바다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군봉에서 내려다본 한려해상공원 ⓒ 윤영숙

통영의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려 절정에 이르면 봄은 북상을 시작하면 언 땅은 녹아 새싹을 피울 것이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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