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만 학문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배수아의 <독학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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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화(pregia)등록 2005.03.21 21:19
창 밖으로부터 스며드는 봄볕은 어디론가 떠나라고 유혹하지만, 때아닌 감기로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다독이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어렵게(도서관에 갈 때마다 늘 대출 중이었던) 빌려온 <독학자>를 읽으며, 동통을 잊어버릴 요량이었다.

소설이라고는 하나, 그의 전작 <에세이스트의 책상>과 같이 에세이적인 느낌이 강했던 <독학자>는 기꺼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와 닿았다. 대학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대학을 떠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던 것보다 낭만적이었던, 혹은 실망으로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었던 학부 시절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이전에 나는 대학에서 진정한 의미의 모든 진화가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했었다. 정신과 지성의 진화 말이다. 그 곳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토론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읽은 것을 서로 나누고 그들이 아니면 성취할 수 없었던 사유를 교환하고 서로에게 서로는 좋은 토론자가 되어주며, 그곳은 천박하고 상업적인 것과 일정 연봉의 직업을 구하려는 실리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영역으로, 오직 정신만을 위하는 정신, 그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상은 주인공이 이전에 기대했던 대학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그의 기대와는 달랐으므로 주인공은 '훗날 대학을 떠난 후에 유일하게 그리워할 장소로 도서관 개가식 열람실'을 일컫게 될 것이라 믿었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서가를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책을 뽑아 들고 읽다가 창 밖을 바라보는 일'따위를 즐겨했던 것을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 주인공에게 더없이 큰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S와 P교수다. 그들의 공통점은 '학문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S는 '문학적이면서도 절제되고, 지적인 힘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번역 문장을 가지고 있는 영문학도였다. S는 '단순히 생활의 편리나 의사소통을 위해 구사되는 언어가 아니라, 마치 음악이나 미술처럼 표현을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언제나 발언을 바라고 있는 듯이 보이는 선택된 문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촌스럽고 비만하며 세련되지 못해 첫눈에 반할 수 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S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다.

또한 주인공은 P교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그대로 아직 내가 만나보지 않은 어떤 세계, 아직 읽지 않은 한 권의 책이었으며 그것은 내가 일순간이나마 느꼈던, 인간의 얼굴과 인격에 드리운 시간에 대한 생애 최초의 긍정적인 인상이었다.>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가 세계가 될 수 있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한 번의 만남 이후, P교수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그를 만나게 될 수 없지만, P교수에게 보낸 편지들을 시작으로 주인공은 마침내 "읽을 수는 있으나, 쓸 수는 없는 스무 살"에서 해방된다.

대학과 사회에 실망하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영혼의 자유’를 위해 대학을 떠난 후 주인공은 스스로가 규정한 대학을 마흔 즈음에 졸업하리라고 낮은 음성으로 읖조리고 있다.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 그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때 나는 스스로 만든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책의 말미에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므로 이 산책이 끝날 때까지는 인간이 무엇을 말하더라도 너무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는 글은 우리가 평생 배움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독학자>를 읽으며 일부 독자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양 기꺼워하며 친근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다수의 독자들에게 학문이라는 것이 대학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려 새로운 인식의 틀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독학자>는 의미있는 소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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