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미와 브라우넬, 여자야구의 희망을 쏘다

미 여자야구 퍼펙트 쾌거 브라우넬은 '리틀 안향미'

검토 완료

박유민(bagoomy)등록 2005.06.03 11:34

리틑 야구단에서 활동하던 안향미 선수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잠실 야구장에서 찍은 사진(1992년) ⓒ 박유민

미국의 상황이 더 낫다고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여자 야구의 입지는 한국만 취약한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여자 야구에 쏟아 부은 돈이 지난해에만 3백만 달러라는 것만 두고 볼 때 아직 걸음마 단계인 우리로서는 부러운 실정이다. 그렇지만 미국 여자 야구도 남자들의 메이저리그와 비교해 볼 때는 아직도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러 있다. 그 가운데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가 놀라운 기록으로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다는 소식은 더운 여름날의 단비처럼 반갑기만 하다.

스폰서 등 재정적 지원이 비교적 안정적인 미국과 전국에 걸쳐 100여 개가 넘는 아마추어 여자 야구팀이 있고 리틀 여자 야구까지 따로 있는 일본과 우리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불모지에서 안향미가 남자 야구팀 소속 선수로 활동했던 어린 시절에 비하자면 브라우넬이 겪은 서러움은 차라리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아직껏 "야구하는 게 소원"이라며 '베이스볼 이즈 마이 라이프'라는 영문을 따서 자신이 창단한 팀 이름을 비밀리에(BIMYLIE, Baseball Is My Life)라 지었겠는가.

그녀에게는 야구 때문에 겪어야 할 시련과 고통의 날들이 숱하게 많았다. 남자 선수들 속에 섞여 있을 때에도 그저 경쟁자로 그들과 서 있어야 했고, 여자라는 차별 때문에 선수들과 한 무리에 섞여 전용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혼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 적도 있었다. 또 "여자가 덕아웃에 오면 재수가 없다"는 편견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는 실력과 상관없이 벤치에 앉아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때도 있었다. 단순히 어린 시절의 꿈도 아니고 스물다섯 해를 넘기는 현재까지도 그녀는 박찬호 선수처럼 높은 연봉을 받고 해외로 스카웃 되기를 바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냥 야구만 할 수 있다면 뭐든 좋다"고 소탈하게 말할 정도로 야구 밖에 모른다.

사실 안향미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덕수 정보고를 졸업하던 2000년, 박찬호 선수의 초창기 에이전트인 스티브 김의 주선으로 미국 워터베리 다이아몬드 팀에서 선수 입단 제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비자의 높은 벽으로 미국 무대에서 뛸 수 있는 길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한국 야구계는 그녀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2005년 2월 서강대교 아래 모여 훈련하고 난 뒤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 비밀리에 야구단 ⓒ 박유민

현재도 우리나라 야구계는 여자 야구에 대한 지원에 매우 인색하다. 그나마 지난해 월드 시리즈에 출전해 화제가 된 후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졌지만 아직 국내 야구계는 그 벽이 높다. 우리 나라의 여자 야구팀이 이제는 작년 3월에 창단한 비밀리에 야구단을 시작으로 전국에 10개팀 정도에 육박하는 여자 야구팀이 생겼다. 수적 성장세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야구 관계자들은 이제 직시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여자 야구는 '완성형'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이다. 시작 테이프를 끊은 지 고작 1년 되었을 뿐이다.

급격한 여자 야구의 양적 팽창이 반드시 희망적인 징후만을 예견하는 것은 아니다. 질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각계의 지원과 노력이 필수적이다. 11세의 브라우넬 선수가 '소프트 볼이 아닌'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유혹과 시련을 견디며 굳건하게 성장해 나가길 빈다. 우리에게는 소프트볼이 아닌 야구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고, 그것이 여자 야구를 만드는 힘이다. 먼 곳에서 그녀의 승리를 기원한다.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