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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관광명소라도 가보면 틀림없이 비싼 돈을 들이고 여행 왔을 터인데, 도무지 관광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그늘에 퍼져 앉아 있는 모습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걸 두고 ‘여행자의 역설’이라 말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힘은 있으나 돈이 없고, 나이가 들면 돈은 있으나 힘이 부친다는 말이다.
유럽의 큰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뒷골목 걷기가 조심스럽다. 가장 두려운 것은 거리의 부랑아들이 아니라, 오히려 ‘개똥’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개똥 잘못 밟아 뒤로 나자빠지면 큰 낭패이기 때문이다.
파리와 같은 큰 도시에서도 개를 데리고 산보하는 보행객들을 자주 마주친다. 외국에서 애완동물을 데리고 지하철이나 버스에 탈 수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거의 보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애완동물을 데리고는 법적으로 지하철과 같은 공공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비행기에서 이동개집을 이용해 애완동물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목격한 것 같다.
어쨌거나 오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개똥은 개 주인이 비닐봉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후 뒤 치닥거리하는 것이 상례이다. 물론 시내에서 특수한 장비를 사용해 개똥을 치우는 광경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요즘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고 들었지만, 서양인들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애완동물과 더불어 한방에 같이 생활한다. 때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침대에서 한데 어울려 자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 서구사람들도 대체로 애완동물은 좋아하지만,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랑스런 개가 싸 놓은 똥만은 질겁하며 싫어한다.
어찌 보면 이건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유럽인들의 역설’이다. 자식보다 더 사랑스런, 애인보다 더 사랑스런 애완견과 함께 하면서도 그 똥에 대해 질겁하며 놀라는 모습을 볼 때면 고소를 금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설사를 한 똥 모습을 잘 보지 못하는데, 그건 물을 적게 주고 고체의 음식물을 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길거리 다니면서 설사를 해대면야 어떤 개주인이라고 당해내고 치울 수 있겠는가? 고체 덩어리이니, 비닐봉지로 잡아넣어 손쉽게 치울 수 있다.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애완견이 싸 놓은 설사를 치우지 않는 (글로 표현하기엔 좀 낯 뜨거운) 이른 바 ‘개똥녀’ 사건이 누리꾼 사이에서 회자되면서 집중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난 그녀를 비난할 목적으로 이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도 어쩌면 말못할 사정이 있었지 않았겠나 하는 동정을 가지면서도 그녀의 면피(面皮)의 두꺼움을 탓할 뿐이다.
어쩌면 그 상황 속에서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 그런 행동을 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용기를 내서 사후 처리를 깨끗이 했다면 미담으로 전해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행위의 무책임성을 논할 정도로 도덕적 양심까지 원망하지는 않겠다. 도덕적 행위가 무엇인지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충고하고 싶지도 않다. 도둑의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대못질하면서 살아가는 전여옥과 같은 공직에 있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학벌 좋은 대통령’을 뽑자는 절규를 아주 자연스럽게 내뱉은 용감한 전여옥 여사에 대한 비판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관점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그 비난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은 썩 내키지 않는다.
다만 전여옥 같은 무식할 정도로 용감한 발언을 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개똥녀’를 보면서 둘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
어떤 점이 비슷할까? 한마디로 하자면 둘 다가 ‘공공의 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모순적-역설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입맛대로,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입맛과 행동에 대하여 다 같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다. 한 사람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아픔을 심어줄 지 모르고, 철부지도 하지 않는 말을 씨부렁댔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말이 개똥녀의 ‘그 강아지’가 설사해 놓은 그 배설물같이 많은 사람에게 역겨움을 넘어 구토의 증세까지 가져오는지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했다는 데에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누구의 말처럼 그녀는 입으로 대변(代辯)을 말하지 않고 사회적 악인 대변(大便)을 쏟아 놓았는지 모르겠다.
그 차이란 것은 아주 사소하다. 그 설사를 싸 놓은 똥개는 밑으로만 배설할 뿐이지만, 입으로는 배설하지 않는다는 데에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코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그 개주인의 빨간 루즈가 페인트된 멋진 입술에 대고 비벼대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래야 또 설사한 만큼의 음식을 받아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아가 사랑까지 받을 수 있다면야 금상첨화이겠지.
전여옥의 대변(代辯)은 무엇을 바라고 쏟아대는 대변(大便)일까? ‘학벌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설령 어떤 대가가 주어진다고 해서 학벌 없는 사람들에게 설사를 해대면서 꼭 그렇게 말해야만 했는가? 그렇게 남의 아픈 가슴을 후벼 파가면서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야만 했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그놈의 ‘웬수같은’ 학벌을 따기 위해 하루하루 고통에 찌들어 죽어가는 학생들이 얼마이고, 학벌이란 멍에에 붙들려 고통의 나날을 지내는 인생의 소박한 꿈이 깨진 사람들이 얼마인지를 진정 모른다는 말인가? 전여옥은 그 고통과 아픔을 한번이라도 헤아려 보기라도 했을까?
스스로를 부끄럼 없이 엘리트주의자라고 자칭하면서 하는 짓은 마치 그 개의 설사만큼이나, 우리 이웃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난 그녀에게서 전형적인 학벌주의자들의 철없는 어리광만을 볼 뿐이다.
그녀도 한때는 글을 통해서 배설의 기쁨을 누렸겠지만, 공직에 나가면 늘 입조심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배워야만 했다. 저 혼자 설사하면 ‘카타르시스’가 온다. 머리도 맑아진다.
카타르시스란 말은 ‘깨끗이 함’이다. 본디 그 말은 의학적인 의미로 설사와 관련 맺는 말이었다. 그 말이 종교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에서 ‘순화’ 혹은 ‘정화’로, 또 법적 의미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미학적-예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작 『시학』에서는 카타르시스라는 말을 한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카타르시스가 있으려면 뭔가 ‘더럽힘(미아스마)’이 있어야 한다. 전여옥은 제가 뱉은 말이 제대로 카타르시스가 되기 위해서는 ‘더러운 설사’를 먼저 선택해야만 한다. 왜 학벌 없는 사람들이 ‘설사’ 노릇을 해야만 하는가? 자신의 ‘말의 더러움’을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에게 전가하고, 청소(카타르시스)의 역할을 부담하는 것은 섹시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자신의 의도를 살리려면 제대로 된 비유와 언어 선택이 필요하다. 언어를 통한 폭력보다 더 무서운 폭력은 없다. 정제된 언어 속에 한 사람의 인격과 인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전여옥은 자신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쯤이 스스로 진퇴를 결정한 시점이다.
우린 사회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변(大便)들이 널려 있다. 입적하신 조계종 종정이셨던 성철 스님께서 늘 하신 말이 생각난다.
“내가 장하는 말인디, 말이 있으되 실천이 없으면 다 똥 막대기여.”
스스로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의 말에 대한 실천을 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 남을 비판하기 앞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인간됨을 배워야 한다. 비판에는 반드시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녀의 정치적 의미가 함축된 언어적 수사는 ‘개똥녀’의 아름다운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애완동물의 ‘똥꼬 밑 닦기’와 다름이 없다. 왜 배설된 설사를 닦는 역할을 나이든 연장자에게 그 역할을 남겨줘야 하느냐 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깨끗하고, 정결하고, 정의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기 바란다면 마찬가지로 그와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타인의 의도를 마땅히 읽어주고 이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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