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친구가 된 산....

검토 완료

배우근(icecap)등록 2005.06.20 16:23

ⓒ 배우근


산으로 오르는 길은 항상 다니던 곳이라 그런지 다리가 저절로 움직입니다. 찬 숨이 더운 숨으로 바뀔 정도가 되자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산의 꼭지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파란 하늘의 정점으로 향하는 태양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와 함께 올라온 귀여운 아이들도 보이고,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연인도 보입니다. 나이 지긋한 백발의 어르신 내외분도 보입니다. 홀로 오른 이도 있습니다. 모두들 여느때보다 훨씬 활기차 보입니다. 1년을 시작하는 출발선에 서있는 마라토너처럼 활기찬 긴장감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 배우근


나는 오롯이 솟아 볕바라기를 하는 바위에 앉았습니다. 청와대가 보이고 그 너머 상계동의 아파트군락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개를 돌리니 남산을 지나 강남의 빌딩 숲도 보이고 잠실과 목동도 보입니다. 버스나 전철로 1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 한눈에 쏙 들어옵니다. 산 정상에서는 인구 천 만의 대도시가 손가락으로 만든 사각형 안에 온전히 들어옵니다. 이곳에서는 바로 아래에 있는 집도 성냥갑처럼 작아 보입니다. 그래도 크기는 제각각이네요. 큰 집도 있고 작은 집도 보입니다. 집의 크기는 대개 가진 재산이나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 배우근


너볏한 산 아래 펼쳐진 각박하고 복잡한 살터에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아등바등 거립니다. 산과 같은 자연에 반해 매우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물질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산에 올라 바라보는 살터는 아기자기하고 안정되어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세상 속에 있을 때는 사회적 불평등과 부의 분배, 교육의 불균형 등 많은 문제로 골머리가 아프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삶의 터전은 거대한 산에 비해 작은 마을처럼 정감 있어 보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도 들리지 않습니다. 찬 바람만이 가만히 앉아 있는 나의 얼굴을 부비고 손을 시리게 합니다. 몸은 차가워져 가지만 정신은 오히려 차분히 식어가며 맑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산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와 산 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갈수록 복잡한 생각들이 차곡차곡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부끄럽네요. 어줍잖게도 산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산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관심도 없었죠. 사람들이 산에 가자고 하면 거절하기 일쑤였습니다. 올라가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왜 올라가냐며 손사래를 치곤했습니다. 그러면서 히말라야 정도쯤 되면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시퉁하게 거드름을 피우곤 했었죠.

그래도 운동하는 건 좋아해서 수영장을 꾸준히 다녔었는데, 나라경제와 함께 가정경제가 힘들어지면서, 집에서 가까운 산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얇아지는 지갑사정을 고려하면 등산은 돈이 들지 않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산을 오르는 날이었습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숨이 턱턱 막혀왔습니다.

ⓒ 배우근


체력이 이정도 밖에 안 되나 하는 한심함이 들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오기로 정상까지 올랐습니다. 헉헉거리며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땀을 식히는데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답답한 가슴을 편하게 해주고 눈을 맑게 씻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등산은 시작되었습니다. 초반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산은 나를 반겨주었고 다가가는 만큼 넉넉한 가슴으로 안아 주었습니다. 요즘은 각다분한 현실을 발아래 두는 여유를 즐기게 되었고 맑은 공기를 가슴에 듬뿍 안고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허벅지에도 힘이 불끈 생겼습니다. 이제는 틈만 나면 산을 오릅니다.

하지만 산은 무작정 오르면 금새 지칩니다. 오래가지 않아 주저앉게 되죠. 조금씩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올라야 합니다. 발걸음이 뒤쳐진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의 창 밖으로는 스쳐가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천천히 오를수록 주변을 돌아 볼 여유가 생깁니다. 높은 정상만 바라보고 서두른다면 주변을 제대로 살피기 힘들죠.

ⓒ 배우근


바위에 뿌리를 박은 석송, 다람쥐, 청설모, 이름 모를 수많은 잡초와 소박한 작은 꽃들.... 그리고 사람들이 산에는 있습니다. 그들과 시선을 나누며 조금씩 무른 땅을 다지듯 흙과 돌을 밟고 오르면 시나브로 푸른 하늘과 가까운 정상입니다. 산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목표가 중요하듯 과정도 중요하다구요.... 산을 단박에 뛰어오를 수는 없습니다. 순리대로 천천히 오르는 산행 길은 그 과정을 보다 윤택하고 풍성하게 해 줍니다.

ⓒ 배우근


같은 산을 계속 오르다 보니, 계절별로 옷을 갈아입는 산의 자태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봄이면 산길을 따라 기지개를 펴는 만물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생명들이 사그락거리며 눈을 뜨는 모습은 내 마음으로도 옮겨와 얄푸른 새싹을 틔었습니다. 여름에는 흘러내리는 땀만큼 세속에 찌든 때가 정화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갈수록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시야가 더위를 물리치게 합니다. 가을이면 막새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조금은 센티멘탈해지지만, 여름내 푸르게 살이 쪘던 나뭇잎이 생명을 다하고 스스로 거름이 되는 자연의 순환을 알게 되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폐부를 얼리는 추위를 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지만 차가움은 곧 시원한 상쾌함으로 바뀝니다. 또한 흰 눈에 덮힌 산의 풍경은 단순한 것이 더욱 아름답다는 실감을 하게 합니다.

ⓒ 배우근


각 계절의 아름다움을 가득 마시며 정상에 오르면, 넓고 푸른 하늘이 열리고 그 속에서 노니는 자유로운 구름과 가까워집니다. 나는 어깨에 내려앉는 그들을 느끼며 가뿐 호흡 한 모금을 내뱉습니다. 그러면 산의 꼭지점을 밟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숨으로 가슴을 채웁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또 다른 산의 정상이 있습니다. 산은 물결처럼 또 다른 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거대한 자연은 나약한 인간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오른 산은 작은 봉오리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하지만 비록 작은 봉오리지만 정상까지 올라 왔다는 자신감은 또 다른 목표로 향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산은 그렇게 살아가면서다 만나게 되는 높고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가는 힘을 심어줍니다. 어느새 튼실해진 심장과 다리가 그 증거입니다.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성숙함까지 키워주는 산은 분명 신의 걸작품입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일생을 바쳤지만 사시사철 변모하는 산의 모습에 비하면 위대한 예술작품도 소품에 불과하고 모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틀 속에 담겨있는 예술은 살아 숨쉬는 자연이 보여주는 여러 모습의 한 단면에 감정을 실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은 짧은 인간의 삶과 달리 영원히 이어지는 대서사극과 같습니다.

ⓒ 배우근


그런데 요즘은 그런 산들이 많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아우르던 산의 가슴선은 높은 건물에 의해 가려지고 있고, 산의 허리는 동강이 나며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과 조화롭던 산이 어리석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 의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던 계곡도 오염되며 약수터도 하나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이 오르는 길가에는 버리는 음식찌꺼기나 오물로 인해 파리가 들끓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산은 자신의 등허리를 짓밟고 오르는 미욱한 인간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산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아파하기 보다는 인간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인간이 물에서 시작해 뭍으로 올라온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언젠가 죽으면 누구나 한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산은 세상을 떠돌다 지쳐 누운 우리의 몸을 받아들이고 다시 만물을 소생시킵니다. 산은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입니다.....

ⓒ 배우근


참, 얼마 전 산에 대한 나의 기본 틀을 흔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이었습니다. 새근발딱거리며 정상에 오른 후, 산에서 내려오는 중 이었습니다. 수풀이 우거진 곳을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몇 걸음을 옮기는데 또다시 나를 보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주변을 살폈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인왕산에 다시 호랑이가 나타났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는데,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또다시 들어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 배우근


그리고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신 수 천 수 만개의 나뭇잎들의 떨림이 파르르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그들이 하나하나씩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랬습니다. 나를 바라보며 부르던 것은 바로 연약하고 작은 푸른 나뭇잎들이었습니다. 현실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그들을 자세히 바라봤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를 향하는 강렬한 시선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참동안 내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나뭇잎의 옹알거림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나뭇잎들을 하나씩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들과의 믿기 힘든 소통을 한 이후에, 산은 나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산과 가까워졌다고는 했지만, 산은 어차피 정상이라는 목적을 가진 도전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에는 정말 든든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산을 오를 때 서두르지 않습니다. 느리터분하게 걷더라도 나무와 꽃, 그리고 바위에 시선을 더 주게 되었고, 가냐른 풀뿌리라도 무딘 나의 신발에 밟힐까봐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의 작은 소통은 캄캄한 밤에 홀로 산길을 걷더라도 무섭지 않다는 믿음도 주었습니다.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