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가 된 행주

신 아연의 어른들을 위한 우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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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ayounshin)등록 2005.06.22 15:50
실로 오랜 만에 구석구석 비누칠에, 온몸을 깨끗이 씻고 이렇게 귀하신 분들과 나란히 몸을 말리고 있으려니 황감스럽기가 이루 말 할 수 없구먼.. 아무리 때빼고 광냈다 한들 바뀔 수 없는 내 초라한 몰골이 여전히 창피스럽기는 하지만.

더군다나 태생에서 오는 숨길 수 없는 귀티와 도도한 자의식으로 파르르 광채마저 뿜는 희디 흰 행주 옆에 있으려니 절로 기가 죽을 수 밖에...

대대한 꼬락서니의 양말짝들이 옆에 있었더라면 내 입지가 좀 덜 옹색스러우련만, 하필이면 행주 옆에서 왠 망신이누...

그래도 내 처지에 옷가지들과 함께 몸을 씻게 된 것이 어디라고 감히 불평이랴.

뭐 그렇다고 내가 떳떳하게 그네들과 함께 목욕물에 몸을 담그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워낙 옷가지들이 뒤엉켜 있다보니 그 녀석들이 물에 들어갈 때 옆에 있던 나까지 딸려들어가 무임승차를 하게 된 거지.

알고보니 행주녀석도 잘못 들어오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야.

"어머나, 이를 어째. 행주를 같이 넣고 빨았네.." 어쩌고 하면서 주인 여자가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면.

그 옆에서 조마조마 하게 눈치만 보고 있던 나까지 집어들고는 "어머머, 이를 또 어째, 행주하고 걸레를 같이 빨았잖아.." 하면서 걸레는 자존심도 없는 줄 알고 막말을 하더구만.

아..!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 나도 한 때는 '잘 나가던 행주' 였다우...

지금이야 신세 망치고 행색 초라해져서 그 때 잘 했더라면 하는 회한으로 날을 지새는 '자학의 걸레'가 되고 말았지만.

아주 오래 전에 공업용 기름에 튀긴 라면 파동이 있었잖아. 먹는 것 갖고 장난쳤다고 사회가 발칵 뒤집혔던 것 기억해? 그 때 담당 부서 장관이 악덕 라면 제조업자들에게 이렇게 일갈을 날려서 국민들에게 인기를 왕창 얻었었지.

'걸레를 아무리 깨끗이 빤다고 행주되냐'고.

공업용 기름이지만 충분히 위생처리 했기 때문에 식용으로 사용해도 인체에 무해하다며 해괴한 변명을 늘어놓던 업주들이 그 말 한마디에 더 이상 입도 뻥긋 못했다더군.

'걸레가 아무리 깨끗하다한들 행주로 쓸 수 있냐' 는 말, 나는 당시 그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

그 말 한마디가 내 운명을 바꿔 놓았던 거지.


난 그 때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 행주였거든. 걸레족속들에 대해서는 어렴풋이소문으로만 듣고 있었어. 신세가 말이 아닌데다 기죽을 못펴고 사는 게 영 신산스럽다고.

그러던 차에 라면 기름 파동이 나서 행주가 어떻고, 걸레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사는 게 두려워지더라구. 이후로 혹시 나도 걸레가 되면 어쩌나 하고, 그래서 다시는 행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게 됐어.

한창 혈기왕성 일할 나이에 그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니 나중에는 몸까지 시름시름 아파지더니 점점 제구실을 못하게 되는거 있지. 심지어는 밥상의 밥풀하나 집어 올리는데도 죽을 힘을 다하게 되더라니까.


내 책임과 내 양심과 내 성실을 다해 행주로서의 삶을 오롯이 살아내지 못하고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젊은 시절을 다 허비하고 말았던 거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나 몰라… 행주로서 주어진 내 능력과 사명을 다하는 것에 집중 해야 할 시간을 '걸레 공포'로 다 허비했으니.


근데 걸레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며 그렇게 몸을 사렸는데 결국은 어째서 걸레가 됐냐구?

마음 아픈 이야기를 오늘 다 털어놓게 되는구먼… 그러다 보니 어땠겠나.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만 하고 있는 동안 열심히 쓰임받지 못한 내 몸에 어느날부터 거무죽죽한 곰팡이가 슬기 시작한 거야.

사지 육신은 여전히 멀쩡한데 거뭇거뭇 곰팡이가 폈으니 주인인들 달리 도리가 있었겠나. 걸레로 쓸 수 밖에…

내가 그리도 두려워 하던 삶의 모습을 결국은 내가 자초한 셈이 됐지.

자 여기까지가 ‘걸레가 된 행주’ 이야기일세.

주어진 모습대로, 자기 사명대로 열심히들 살아가시게나.

어떤 상황에서든 앞날을 미리 염려하면서 생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하지 말도록 하게. 나를 반면 교사로 삼게.

한 세상 열심히 살지 못한 후회가 이리 마음을 아프게 할 수가 없다네. 오늘은 모처럼 몸까지 깨끗이 씻어서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왠 신세타령을 이리도 하누…

아, 이럴 땐 주인장이 방바닥에 흘린 소주라도 한모금 목구멍에 적실 수 있으면 좋으련만. 행주 시절에는 식탁의 소주잔 엎질러진 것에 입대기가 그리도 싫더니만 요즘은 맨바닥에 술판 벌이는 날이 행여 올까 몹시도 기다려 지는 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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