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영정의 사진만을 남기고 먼저 그곳으로 간 전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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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navylynx)등록 2005.06.24 19:01
오늘은 먼저간 이들을 위해 한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사의 Work-shop을 마친 지난 주 토요일 귀국 후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본가로
직행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올라온 후 TV에서 본 것은 바로 안타까운 전우들의 소식이었습니다.

사람들...
특히 軍 이라는 조직을 전혀 모르고 단순히 '다녀와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
"이래서 자식을 어떻게 군대에 보내나..."
개인적으로 답답했습니다.
제 젊은 청춘의 일부분....
젊음의 일부분으로 지금도 제 가슴속에 살아 숨쉬는 그 곳...
그 곳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요동치며 피가 뜨겁게 달아 오르며 북녘 땅을 향해 외치던 젊은 함성이 아직도 제 귓가에서 맴돕니다.
"군에서 선임병에게 폭행을 당했다."
"선임병의 가혹행위..."
"왜 상병만 당했나?"
"GP 병사들..."
신체 건강하고 정신적인 문제가 없는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그곳...
국적포기와 각종 청탁과 비리를 저지르며 안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X같은 인간들이 있지만 구태여 피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있고 지금 이 시간과
화려한 불빛 속에 모두가 술에 취해 비틀거릴 도시와는 다른 칠흑같은 어두움과 주황색 투광등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졸린 눈을 부릅뜨고 전선의 밤을 밝히는 젊은 전우들이 있기에 저는 편안히 잠을 청합니다.
이번 사건을 보며 예전에 제가 GOP에서 근무할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월요일에 출근하니 회사에서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한마디 했습니다.
"부대에서 욕쟁이로 이름을 날렸던게 바로 접니다. 그런식으로 총을 쐈으면 나도 수십명 죽였고, 나도 수십명한테 총 맞았을걸요."
오늘 출근한 후 생존한 전우들이 분향소를 찾은 언론 보도를 접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습니다.
저 또한 2003년 불의의 사고로 먼저 국립묘지에 입주한 선후배들이 있기에....
2003년 무덥던 8월 장례를 마치고 대구 시립 화장장으로 이동하는 군용 구급차 7대 중 2대에는 제가 좋아했던 한 군대 선배님과 얼굴도 모르고 불귀의 객이 된 후 알게된 대학 후배가 각각 누워 말없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떠나는 그들을 보며 군인으로 마지막 경례를 하는 순간....
북받치는 심정...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차렷자세로 온몸을 떨며 그들을 바라보면서 울었습니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군인으로써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팔을 내리지 않는 것 외엔...
눈물이 멈추지 않더군요.
훈련 중 먼저 순직한 그들을 보내며 살아서 숨쉬는 것, 그들과 같이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러웠습니다. 너무나 미칠 따름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제 가슴 한쪽이 저려옵니다.
어제 분향소를 찾은 살아 남은 전우들....
그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허름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군에 있을때 즐겨 읽던 소설《데프콘》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살아남은 자로 해야 할 것은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겠지요.
동생같이 여기던 녀석도 불의의 사고로 2000년에 대전 현충원에 말없이 누워 있습니다. 회사 책상에는 GOP 근무를 할때 그 녀석이 찍어준 제 사진이 바쁜 사회생활 속에 쫓기고 있는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같이 철책을 돌며 힘들었지만 둘이 이런 말을 공감하며 생활했습니다.
"기현아 임마. 여기는 대한민국 군인들 중 개나 소나 다 오는 곳이 아니야.
전역하고 나가서 누군가가 힘들었다고 지랄하면 이곳에서의 생활 한마디 해줘.
X 같다고 생각치만 말자. 이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여기에 서 있어 보겠냐..."
주간 순찰시에도 방책선에서는 절대 금연해야 하지만 우리 둘은 담배 한모금에 웃어가며 그렇게 그렇게 '규정'을 어기며 그 X 같은 생활을 나름대로 즐겼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현충일.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단순한 '공휴일'이 아닙니다.
연휴가 이어진 올 현충일,
연휴라는 개념으로 여행을 참 많이 다녀오시더군요. 특별한 감정이 없으신 분들께서 여가를 즐기는 것이니 나쁘다고는 생각치 않고, 다만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한번정도 생각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해마다 먼저 간 그들의 기일이 다가오면 저의 가슴은 죄스러움으로 가득찹니다.
살아남아 멀쩡히 밖으로 나온 녀석이 먹고 살겠다는 핑계하나만으로 찾아가질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군대에 못 보내겠다."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제가 한말씀 드리지요.
도대체 어디까지 군에서 책임져야 합니까?
힘들면 보고하고, 못 견디겠으면 말 하면 될 것을...
신세대 장병들의 심리 파악 필요?
다들 집에서 귀하게 큰 자식들입니다.
당신들께서 욕하는 군인들 또한 그 집에서는 귀한 아들들 입니다.
돌을 던지시기전에 당신께서 당신의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스스로 한번 돌아보시지요. 어릴때 집에서 엄하다면 좀 엄하게 컸습니다. 큰집, 장손, 외아들이란 이유로 철딱서니 없이 자라왔지만 '지킬 것은 지키고,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라'란 말을 귀찮을 정도로 듣고 자랐습니다.

어디까지 군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지요?
일부에서는 김일병을 마녀사냥식으로 몰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나 전시 생사를 같이 해야 할 자신의 동료에게 총을 돌리는 김일병...
그는 이미 대한민국의 아들이 아닙니다.
"실탄을 내무실에 반입하다니.."
접적지역이므로 실탄 휴대는 당연합니다. 탄입대에는 언제나 실탄과 수류탄이 있습니다. 작정을 했다면 상황실에는 갈 이유가 없었겠지요.
"거치대에 시건 장치를 왜 하지 않았나?"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바로 총을 들고 나가야 하는데 언제 열쇠 풀고 그럽니까? 군에 다녀오신 분이나 그렇지 않은 모든 분들도 이 얘기는 아실겁니다.
-총은 제 2의 생명, 애인- 자기총은 자기가 관리하는 것입니다. 총기 사고가 있어 개인보관이 아닌 거치대를 통해 내무실 관리하는 것이지요.
"왜 상병만 죽었나?"
GP나 GOP 부대는 경계부대이므로 병력 인가 대비 120%에 가까운 인원을 투입합니다. 또한 투입 후 한달 이내에 전역병이 많을 경우를 대비 130% 이상 병력을 투입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신병교육대에서 수료를 마친 인원을 무더기로 해당 부대에 배치하게 되고 이러다 보니 '동기' 기수가 많게 되겠지요. 참고로 제가 근무하던 대대에서는 일병 진급 후 두달만에 선임병들이 모두 전역해 '최장기간 분대장 임무 수행' 기록으로 사단 기네스 북에 오른 친구도 있습니다.
"국방부 수사 혼선? 의혹? GP 공개?"
숨기는 것은 없습니다. 군에서 저는 공보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군에서는 더 이상 숨기려 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속 정확하게 알려야 하나 사건 초기 계속되는 의문과 질문에 답하기 위해 확인된 것만 바로바로 알리다 보니 착오가 생겼겠지요. 이번달에 전역하는 군 동기들 중 헌병으로 7년간 복무한 친구가 두명이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이런 보도가 나올때마다 미치려 합니다.
"그럼 언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해 줘야 하냐?"며 저에게 푸념을 늘어 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전방 GP는 최고의 보안시설입니다. 국민의 알권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다만 안보상 문제가 없는 선에서 그쳐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정감사시 '충무계획'을 언론에서 보도했을때 저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국가 기밀이 '알권리'란 것에 포장되어 나오다니...

그 곳에서 경험치 못한 이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르겠지요.
해당부대에 근무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확한 사실을 발표해도 '그런게 어디있느냐'며 믿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 또한 전방 부대와 후방부대에서 근무했었고, 그나마 보병, 포병, 항공 부대를 돌아다녀 약간은 알지만, 육해공군, 해병대의 정확한 특성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전역 후 저는 아예 군에 관련된 일은 아예 입을 닫고 삽니다. 시쳇말로 '말해봐야 믿지 않고' 딴 사람들에게 들은 것과 자신의 경험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 하니까요.
군이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해당 병사를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간부들의 책임은 묻지 않을 수 없고, 경계근무를 임의로 변경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허나 개인적인 감정으로 전시 우리의 재산과 사랑스러운 가족들의 생명을 앗아갈
적에게만 허용된 총구를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줄 전우들에게 돌린 것...
과연 어디까지 군의 책임일까요?
누구 명확하게 말할 사람이 있으십니까?
만약 김일병이 군이 아닌 일반 회사나 다른 조직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과연 그 조직이 어디까지 이에 대한 책임을 질까요?
답답합니다.
죽은 전우들 보다 오히려 살아남아 '가혹행위'를 의심 받는 그들...
슬픕니다.
적의 공격으로 알고 대응하기 위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신이 먼저 뛰어나가다 아군에게 배신 당해 차가운 관속에서 말없이 누워 있는 그들...
오늘은 한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출근해서 신문을 보며 살아남은 장병들의 일문일답을 봤을 때 2년전 부대 사고가 났던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입사 동기는 지나가는 말로 이제 잊으라고 하지만 전 그때를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국화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2003년 마지막까지 민가에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두명의 조종사, 추락하는 항공기에서 마지막까지 혼선을 다했을 두명의 승무원, 추락하는 순간 자신의 동공에 닥쳐오는 넓은 땅을 보며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했을 세명의 탑승자들...
뜨겁던 8월의 여름 그들 시신에서 풍겨오는 피비린내와 조화로 보내진 국화꽃의 향기가 같이 대구 통합병원 주변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2003년 8월 무덥던 여름날 대구 국군병원에서는 그렇게 살다간 젊은이들이 말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언론의 오보를 막고 순직한 장병들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를 알리기 위해,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 미확인 보도와 오보를 냈습니다.
아들, 동생의 시신을 확인 한 후 '내 아들이 아니야'라며 오열하던 유족들과 추락하며 땅에 부딪힐 때까지 민가를 피하기 위해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저의 사랑스러운 전우들을 두번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방송과 언론에 알리고 정정보도가 된 8월 16일 새벽에서야 웃는 모습의 영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7명의 전우들 앞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사흘간 분향소에 있으면서 맡았던 피비린내와 국화꽃의 향기...
지금도 힘이 들고 나쁜일을 접하면 그 때의 향기가 코 끝을 스쳐갑니다.
오늘 아침 제 코 끝으로 그 향기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먼저간 전우들..
이번 사고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웃는 영정으로 말없이 있는 우리 앞에 있는 그 친구들...
슬픔은 살아 남은자의 몫이기에 오늘 한껏 슬퍼하렵니다.
8월 14일은 항공기 사고 2년째 기일...
대전 현충원을 찾으면 이번 사고로 먼저 국립묘지에 입주하게 된 이 친구들을 찾아 술 한잔을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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