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6.25참전사, 태극기휘날리며!

손계남 6.25참전용사의 리얼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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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혁(color9382)등록 2005.06.25 15:40
공산주의자들의 무력침탈을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6·25전쟁이 55주년을 맞는다.

4백만 여명의 인명피해와 1천만 여명의 이산가족, 수많은 상이군인과 전쟁미망인, 고아들이 생겨난 비극의 6·25는 우리 민족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읍에서는 6.25 전쟁으로 인해 2백여명의 당시 젊은이가 조국을 위해 참전했고, 지역을 수호하다 산화한 전사자의 수가 3천318명이다.

((제55주년 6.25를 맞아 24일 정읍의 대표적인 참전용사를 만났다.))

6.25전쟁 발발 당시 최전방에서, 서울에서, 때론 후방에서 전국을 돌며 수많은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고 수없는 죽을 고비를 넘긴 손계남(76 ) 참전용사는 매년 6.25를 맞는 기분이 남다르다.

정읍시 보훈회관에서 만난 손옹은 젊은 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손옹은 인터뷰에 앞서 요즘 젊은 세대가 6·25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실을 크게 걱정했으며, 젊은 층의 국가안보에 대한 생각을 묻는 등 현 시국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다.

이어 꼼꼼한 인터뷰 질문을 준비하고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으나 한두가지의 질문에 이어 참전에 관한 이야기에 들어서자 손옹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인터뷰 형식으로 기사를 쓸 수 없어 불가피하게 손옹의 전쟁참전경험담을 모든 사실에 근거해 색다르게 각색해본다.

((영화 같은 전쟁이야기))

<<전쟁 발발 당시 육군 하사였던 손옹은 1952년 2월 명예전역을 할때 계급이 이등상사로 진급해 소대장직을 맡았으나 이야기 중간과정의 진급시점을 일일이 표현하기 어려워 호칭을 처음 계급인 하사로 통일한다.>>

“이번 주도 모조리 외출, 외박 나가버렸군”

손 하사는 본인도 자주 외출을 나가는 처지지만 짧은 넋두리를 한다.

“어쩌겠습니까. 배들은 고프지, 부대에 군량미는 없지. 그래도 차라리 나가서 배들을 채우라고 내보내주는 사단장님 방침이 고맙죠.”

딱히 나갈 곳이 없는 김일병은 힘없이 답한다.

“그래도 북 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던데..... 전방부대에서 이래도 되는지 원”

손하사는 자신도 모르게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응수한다.

벌써 군에 입대한지도 2년여. 이제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손꼽고 있는 손하사는 그렇게 6월24일(토요일) 밤을 맞았다.

"왜애앵~~~" 3.8선 앞 부대 안에 우렁찬 싸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녘 갑자기 요란한 싸이렌 소리에 눈을 뜬 소대원들은 커진 눈으로 서로의 눈만 쳐다본다.

이때 당직근무를 서던 이상병이 미친듯이 뛰어 들어와 소리친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북놈들이 개미떼처럼 내려온답니다. 빨리 기상하십시요.”

날벼락 같은 소리에 몇 되지도 않은 소대원들은 등골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빨리 빨리 무장하고, 실탄 가져와, 야 임마 뭐하고 있어, 빨리 군장 챙기란 말이다.”

소대장은 언제 들어 왔는지 목이 터져라 서두르도록 지시를 내린다.

“이 새끼들이 기어이.....”

손하사는 피가 역류하는 것을 참으며, 본인도 능숙한 솜씨로 상황파악을 하면서 복잡한 머리로 생각한다.

이렇게 손하사는 6.25를 맞았다.

1사단 11연대 ㅇ중대 정보과 소속이던 손하사는 이미 6.25발발 전 북에 넘어가 해주에 있는 북측 보안대를 폭파한 경험과 이중간첩 3명을 끈질긴 추격 끝에 잡아 최경주 연대장에게 인계한 노련한 소대원이었다.

중대원들은 급히 연병장에 집결했다.

백선엽 11연대장은 침착하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착해라. 전방에 있는 우리가 최대한 적을 저지해야 밑에서 충분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모두 목숨을 걸고 적을 맞자, 그리고 전면공격으로 우리 부대가 최고 앞장서서 싸우자”

11연대는 곧바로 전투에 참여했으나 워낙 많은 숫자의 이북군의 기세에 눌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11연대는 문산에 임시 집결하니 어느새 탄약과 폭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여기서 재정비를 갖춘 11연대는 임진강 상류에서 적을 기다렸다.

오후 4시경 인민군들은 탱크를 앞세우며 우마차에 야포를 탑재하고 물밀 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보병까지 이들이 이동한 시간은 무려 2시간여. 11연대는 숨죽이며 기다렸다.

하지만 공격은 인민군들이 먼저 했다.

엄청난 폭격을 가하며 아군을 꼼짝 못하게 만든 인민군은 거침없이 직사포 등을 가해 M1소총으로 응수한 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실탄도 모두 허비한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손하사도 살기 위해 무작정 앞만 보고 뛰었다.

산등성 묘지 앞을 뛰어가던 손하사는 그만 칡넝쿨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이때 포탄 하나가 손하사 바로 앞에서 터지며 손하사는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휴~~~ 넘어지지 않았으면 포탄에 정통으로 맞을 뻔 했네. 이건 기적이다.”

정신을 차리고 도망을 치던 손하사는 휴가, 외출, 외박자들이 재집결지하는 곳을 간신히 찾아 여기서 60여명의 병력을 만나 함께 무작정 문산으로 내려갔다.

도착한 문산에서는 영관급장교들이 이들에게 불호령을 던졌다.

“왜 후퇴했느냐,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막아야 할 것 아니냐, 모두 총살시키겠다”

하지만 이들도 지지 않았다.

“죽이려면 죽이십시요, 까짓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하면서 이들은 버텼다.

마침 이곳에 있던 육사 9기생들이 제제를 가해 이들은 다행히 사고는 면했다. 하지만 이들은 재공격을 곧이어 감행해야만 했다.

손하사는 벌써 며칠동안 전투에 쉼 없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임진강변 전투에서 공중전 폭격과 막강한 인민군들의 화력 앞에서 부대원들은 수없이 죽어 나갔고 전장터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손하사는 점점 밑으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후퇴 하던 중 만난 피난민 아주머니가 양말과 팬티를 빨아주겠다는 말에 잠시 곤한 잠을 청하던 손하사는 잠에서 깨어보니 부대원들과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손하사는 무작정 밑으로 내려갔다.

내려오면서 배고픔에 지친 손하사에게 감자를 주는 피난민들도 있었다.

어느덧 손하사는 한강부근까지 내려왔다.

한강을 도하하고자 기회를 옅 보던 손하사는 한강을 건너려는 피난민 7명과 함께 도하를 시도했다.

장마철이라 물이 범람했지만 무사히 건너 마음 놓고 다니던 중 갑자기 거친 이북 억양의 고함이 들려왔다.

“간나 새끼들, 다 손들라우”

갑자기 나타난 인민군들은 다짜고짜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5번째쯤에 서 있던 손하사는 갑자기 “뛰어라” 소리에 미친 듯이 한강쪽으로 뒤도 보지 않고 뛰었다.

총성은 끝이지 않고 울렸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진 손하사는 또다시 정처 없이 헤매며 내려 가고 있었다.

이때 한 할아버지를 만나 마을 동태를 물었다.

“모양새가 군인 같은데 이미 여기도 인민군들이 쫙 깔렸으니, 어허, 이리오게, 자 이옷으로 갈아입게”

연신 고맙다고 손하사는 말하며 물 한바가지 얻어 먹고 손하사는 피난민 행세를 하고 마을 빈집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마을 아낙의 눈에 띄어 아낙의 남편이 인민군 중대본부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손하사는 급히 다른 곳으로 탈출했다.

새벽 닭이 울자 다시 한강에 도착해보니 한강에는 셀 수 없는 시체로 덮여 있어 지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하사는 물어물어 영등포 광장에서 낙후병들이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10일 가까이 굶은 손하사는 간신히 18연대 파견대와 합류 할 수 있었다.

잠시, 아주 짧게 휴식을 취했으나 적군은 또다시 개미떼처럼 밀려왔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치는데 옆에서 총탄을 맞은 아군들의 살려달라는 비명소리에 손하사는 괴로워하며 정신없이 뛰고 또 뛰었다.

손하사는 안양에 있는 보병학교로 찾아 갔다.

이곳에서도 얼마 되지 않아 전투에 참가해 적군의 제트기 공격을 받아 손하사는 무조건 도랑에 엎드렸다.

이때 옆에 있던 병사 하나는 차 밑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만 폭격으로 사망하고 손하사는 불행 중 다행으로 포탄의 탄피에 등을 맞았다.

또다시 혼자가 된 손하사는 자신의 소속부대인 1사단의 행방을 물으며 안양 방지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1사단을 표기하는 말뚝만 있고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헤메다 자신의 고향 정읍 칠보 사람인 김현성을 만나 반가움에 1사단 소식을 물었다.

김현성은 말했다.

“1사단은 수원에 집결했다던데”

이후 어렵게 1사단 소속 12명의 병사를 만난 손하사는 수원농고에 집결한 육군본부에 합류, 이곳에서 중대장으로부터 함께 싸우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때 미군이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손하사는 이후 대전을 거쳐 음성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괴산, 보은을 거쳐 선산에서 낙동강 전투에 참여했다.

낙동강전선에는 UN군들이 철수하며 남기고 간 보급품에 의존하고 드디어 낙동강전투에 임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전투 당일 피난민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려들었다.

“인민군의 폭격이 조만간 있을 것이니 피난민들은 강을 건너지 마시오”

군인들은 흥분한 피난민들에게 계속 경고 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떤 피난민들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인간고리를 형성하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들 앞에 올 곳이 오고 말았다.

북한군 전투기는 무차별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피난민들은 대부분 죽고 다치며 그야말로 낙동강물이 핏빛으로 금세 변해버렸다.

손하사는 울부짖었다.

“이럴수가”

이렇게 낙동강 전투는 비극을 남기고 끝이 났다.

손하사가 소속한 아군은 해평국민학교에서 집결한 후 미군들이 지원한 중화기로 무장했다.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밀려오는 인민군들에게 이번에는 화력을 제대로 갖춘 아군도 집중 포격과 사격을 실시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탱크 6대를 획득하고 인민군들이 뒤로 밀려가는 전공을 세웠다.

손하사는 대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지휘관은 말했다.

“대구를 사수하지 못하면 모든게 끝이다, 나라를 위해 죽기로 싸우자”

이러면서 팔공산전투의 막이 올랐다.

1950년 뜨거운 8월 팔공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군과 적군은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반복했다.

어느날 손하사는 연대장의 부름을 받았다.

“손군 오늘밤 우리는 총공격을 시도할 것이네, 하지만 우리만의 힘으로는 안되니 부하 1명을 데리고 가서 반대편에 있는 20연대에 내 서신을 전해주게, 자네만 믿겠네”

손하사는 빠른 부하 1명을 데리고 밤길을 달렸다. 뛰면서 목숨은 붙어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20리 길을 무사히 달려 20연대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1시경.

서신을 전해 받은 20연대장은 뜻밖의 말을 했다.

“우리는 준비부족으로 새벽공격이 어렵네, 오느라 수고했지만 자네들이 다시 돌아가 내 뜻을 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둘은 또 밤길을 달렸다.

부대앞에 거의 다다렀을 때 새벽을 진동하는 총성이 울렸다.

손하사의 몸에는 이미 팔과 다리에 두방의 총알이 박혔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손하사는 20연대장의 답변을 전하고 자칫 아군을 몰살로 몰고 갈 뻔한 전투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부상을 당한 손하사는 전선에서 나와 대구대학병원으로 후송됐다.

손하사는 모처럼 호텔같은 침대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손하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행운도 맛봤다.

대구시내는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적군이 쏜 2발의 장거리포에 시민들은 불안에 떨었고 아군은 최후전투를 준비했다.

50일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보동전투는 치열하고 처절했다.

육박전이 이어졌고 송현석 특공대 부대장이 이끄는 특공대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자고나면 쌓이는 것은 아군과 적군의 시체뿐이었다.

미군이 빼앗긴 고지를 아군이 되찾고, 적군이 다시 뺏고, 이러면서 50일이 지나갔다.

처절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군은 추석이 지나고 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손하사 들었어, 1사단이 벌써 평양에 입성했데”

손하사는 기쁨에 겨워 당장 평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손하사는 여건상 남원으로 갔다.

“고향을 지척에 둔 손하사는 매일 고향 정읍 생각에 감히 연대장에게 졸랐다.

“연대장님 고향과 가까운 전주로 보내주십시오”

전주에서는 정읍으로 보내 달라 요청했다. 이미 수많은 전공을 세운 손하사의 요청을 부대에선 들어줬다.

정읍여중에 자리잡은 부대에 도착, 고향땅 칠보를 가고 싶었지만 갈수는 없었다.

손하사는 다시 전선에 불려가 오대산전투, 향로봉전투. 설악산전투 그리고 치열했던 고성전투에 참전하고 또다시 총탄에 큰 부상을 당해 속초야전병원을 거쳐 대수술을 받고 부산으로 이송 후 1952년 2월7일 명예전역했다.

국가는 이미 이등상사로 소대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한 손하사에게 ‘화랑무공훈장’을 내려 치하했다.

<<시간에 쫒겨 서두 없이 서투른 이야기를 써내려 가다보니 손계남 참전용사의 명예에 혹 손상이 될지 몰라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손계남옹은 6.25참전용사 상이군경회 정읍시지회장직을 1997년부터 지금까지 연임하고 있다.

예전 JTV에서는 손옹의 참전담을 다큐멘터리로 전달했다고 한다.

말씀도중에 1사단이 평양에 입성하는 대목을 말하며 활짝 웃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손옹의 모습에서 목숨을 걸고 조국사랑과 나라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전쟁영웅이 아닌 당당한 인생을 살아온 인생영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손옹은 전역 후 한전에서 25년을 근무하고 고향을 지키며 살아오고 계신다.
이날 만남과정에서 전길창 파월장병정읍시지회장은 “6.25전쟁 당시 젊은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현재 나라는 우리에게 6만원이라는 사탕값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며 “돈이 문제가 아니라 후손들이 우리를 이렇듯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만약 나라가 위급해진다면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겠느냐”며 질책을 가했다.

6.25참전용사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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