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에 빠진 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

지역감정 극복은 보안법 철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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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기(imbg)등록 2005.09.03 14:46
1.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남북화해의 물결을 타고 몇 년 전부터 제한적인 숫자이긴 하지만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낸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들의 소재를 겨우 파악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분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107세까지 장수한 한 어머니만 남한의 아들과 상봉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산 1세대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너무나 길었던 것이다. 천추의 한을 간직한 채 눈을 감았을 그들을 한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실재로 내 외삼촌은 6?25 이전에 38선 부근에서 근무 중 북한군이 침투로 인한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사체를 찾지 못하여 실종으로 처리되었다. 그 때문에 외할머니는 외삼촌이 어쩌면 북한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 돌아가신 순간에도 외삼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남북에 얼마나 많은 또 다른 우리의 ‘외할머니’들이, 휴전선 어엿이 살아있을 자녀들과 생이별 끝에 두 번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그런데 남북분단과 냉전의 희생양으로 그렇게 깊은 한을 간직한 채 스러져간 그들을 보며 집안에 이산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서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족분단은 특정 이산가족들에게만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며, 대다수 국민들은 아무런 해당사항이 없는 문제일까? 수천 수 만 명의 ‘외할머니’들에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도록 깊은 한을 남겼다면 6천만 민족 전체에게 남겨진 한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꺼질 만큼 깊고 클 텐데 그것은 정녕 어디에 꼭꼭 숨어있기에 107세 어머니의 한은 TV에 보도되어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면서, 막상 조상 대대로 한민족 한국가로 살아온 우리 겨레가 남북으로 두 동강나 민족전체가 입은 그 깊고 깊은 한은 TV는커녕 지방신문 어느 구석진 지면에도 단 한 줄도 내비치지 않는 것일까?

과거에는 민족분단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행위로 치부되어 아무도 이를 공공연히 거론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민족분단과 통일에 대한 자유로운 공개논의가 가능한 오늘날에도 우리 민족이 입은 분단의 상처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혹 민족분단의 상처는 국민 모두가 겪고 있는 일이므로 국민이나 언론 그리고 남북문제 전문가들조차 새삼스럽게 이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모두들 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심리학자 존 달리와 밥 라타네가 ‘이웃들의 수수방관 속에 피살된 한 여성의 죽음의 경우처럼 개인의 책임 의식은 그들이 소속한 집단의 크기에 반비례 한다’ 고 이른바 군중 속에서 벌어지는 범죄에 대한 대중의 이해할 수 없는 방관현상을 분석했던 바와 같이, 민족분단이라는 가해자가 온 국민의 마음을 수 십 년간 야금야금 ‘살육’하고 있음에도 개인들은 분단 상황에 맞서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민족전체의 책임이라며 모두들 수수방관함으로서 그것이 종국에는 국민들과 언론 그리고 전문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일까?

아무튼 아무도 이 깊은 분단의 심연을 들여다보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으므로 나라도 당돌이 나서서 허튼 말발이나마 세우려한다.


2. 지역감정의 근원

우리 국민들이 입은 분단의 상처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전 분야에 걸쳐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의 왜곡된 정치문화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를 거론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서 갈등이다. 이제 우리나라 선거는 더 이상 여야의 정책심판의 장이 아니다. 선거전에는 온갖 화려한 정강 정책과 주의 주장이 난무하지만 그것은 죄다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막상 선거 때 만 되면 어김없이 호남과 영남의 편 가르기가 재연되고 선거는 각 당이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해당지역에서 얼마만큼의 몰표를 얻느냐로 그 결과가 판가름 나고 만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보수적인 공화당과 그에 비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으로 국민들의 지지가 엇갈리고 정치 선진국인 유럽도 대부분 이런 식으로 좌(진보) ? 우(보수)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서 나라가 운영된다. 반면에 우리나라 정당들은 좌우익이 아니라 동?서로 나뉘어 경쟁하는 것이다.

흔히 새는 좌우 양 날개로 난다고 한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서 만큼은 이 말은 맞지 않다. 우리나라 새(정치)는 해괴 망칙하게도 좌우가 아니라 동서 양 날개로 날고 있는 것이다. 남북의 분단으로 인하여 좌익(진보)활동이 원천 봉쇄되어 여야가 모두 우익으로만 채워져, 정치이념과 지향점이 같은 여야만 있다보니까 이념적 경쟁꺼리가 없으니까 엉뚱하게도 동서로 편을 갈라 지역갈등 구조를 연출하고 만 것이다.

혹자는 ‘보수 세력끼리, 여야로 나뉘어 정권획득을 위한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상대방의 독주와 전횡을 서로 견제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그런 정치구도 자체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 벌어진 양반 관료나 선비들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보듯이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보수적인 지배층끼리의 다툼은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3.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

그렇다면 정치란 왜 좌우익이 공존해야하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 우익과 좌익이 개념부터 살펴보기로 한다.(물론 글쓴이의 주관적인 관점이다)

먼저 우익의 토대는 기득권 세력이며,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는 기존 체제와 질서가 유지되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잘 지켜줄 강력한 치안과 국방력 유지를 바라며, 기층민을 위한 사회보장과 개발주의를 가로막는 환경관련분야에 예산이 지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이른바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추구하며 기존체제 유지가 자신들의 이익이므로 준법정신이 투철하며 정치성향은 당연히 보수적이며 국수주의적이다.

반면 좌익의 토대는 현 체제와 제도에서 소외된 자나 그들을 대변하는 세력들이기 때문에 기존 체제나 제도를 타파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체제와 제도를 바라며, 치안과 국방비에 과다한 예산이 지출되는 것보다는 기층민을 위한 사회보장과 산업화의 폐해를 치유할 환경관련분야에 예산이 지출되는 것을 원하므로 이른바 ‘큰 정부’를 선호하며 사회적인 평등과 연대를 추구하며 자신들이 기층민들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개혁과 인권수호 의식이 강하고 기존체제에 대해서는 다분히 비판적이며 정치성향은 진보적이며 개방적이다.

이상과 같이 인간사회란 어디나 주류와 비주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기득권층과 기층세력, 보수와 진보세력 등으로 나눠져 있고 이를 크게 보면 좌익(진보)와 우익(보수)로 대별된다.

우익은 성격상 기득권층을, 반면에 좌익은 기층민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한편도 사회 구성원 전체를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정치란 대립되는 양 세력의 주의주장이 서로 공존하며 적절히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양자의 세력이 적정히 유지되어한다. 그래야만 그 사회가 안정되고 굳건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익세력과 보수정치만 존재하고, 좌익세력 진보정치가 철저히 말살된다면 그 사회는 결국 보수주의 일색이 되어 비주류와 소외세력의 극력한 저항으로 사회 통합력이 와해되어 체제가 전복되고 말 것이다. (진보세력이 독주할 경우도 동일)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남북분단과 6?25 그리고 냉전 상황을 거치면서 좌익? 진보세력의 씨가 말라 버렸고 우익만이 득세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형성되었다.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우익만 존재하고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할 진보(좌익) 정치세력의 멸절 때문에 우리 정치는 균형을 상실한 채 병든 체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익 정당들만 존재했던 남한에서 좌익을 불법화한 반공법(현재는 국가보안법)의 엄호하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의한 극우 유신독재와 군사독재 체제에 의한 기형적인 동서 갈등구조가 생겨나고, 좌익 정당만 존재한 북한에서 폐쇄적인 극좌 공산독재체제와 기형적인 부자상습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좌익이 사라지고 우익 정당들만 존재했던 남한 땅에서는 우익이 제 세상을 만났을 것 같지만 언감생신 우리나라는 좌익이 사라진 후로 우익은 역시 곧 자취를 감취고 우익이나 보수 대신 극우와 수구만 판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우익이 사라지고 좌익 정당들만 존재했던 북한 땅에서도 좌익이 제 세상을 만났을 것 같지만 언감생신 우익이 사라진 후로 좌익 역시 곧 자취를 감취고 좌익이나 진보 대신 극좌 모험주의자 와 시대착오적인 부자상습체제가 자리잡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해방이후 최근까지 어떤 우익 정치인들이 우익의 모토인 기업의 자유경쟁과 국민의 정치적인 자유와 민족문제에서의 자주국방을 주장했었는가? 오히려 정경유착으로 특정기업에 대한 특혜로 기업의 자유경쟁을 옥조이고, 집시법으로 국민들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속박하고, 한미, 한일 군사동맹으로 동족의 목줄 조이기에 바빴지 않은가. 그러기에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에게 기득권에 집착한 수구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 정경유착 타파와 기업의 자유경쟁과 국민들의 자유회복과 민족화해와 자주국방이라는 ‘우익’의 가치를 위해 자기 몸을 바쳐가며 투쟁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보수주의자가 사라지고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 역할까지 도맡게 된 현실을 절절히 묘사한 글은 아래 웹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우리나라에는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전통주의, 분단, 지역주의 등의 여러 가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상의 특징은, 특정한 이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또 그런 점은 왜 한국에서는 보수주의의 이념적 지배력이 더욱 강화되고만 있는가, 혹은 과연 한국에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명쾌한 답변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무리 분단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는 500년의 역사를 지닌 왕조가 쓰러진 자리에 건설된 나라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주의가 허약하다.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고루한 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합리적 보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 남긴 해악이 참 많지만, 이 땅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진영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분들을 친일에 동원하여 그들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게 했다. 남한에서 정권은 백범 김구 선생처럼 너무나 보수적인 분을 여순 반란 사건의 배후조종자인 빨갱이로 몬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지금의 보수라고 외치는 이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우쩌둥도 미8군 사령과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그들은 일본의 보수주의를 흉내냈지만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러?일 전쟁 때 너무 큰 희생으로 일본 시민들이 노기 사령관에게 항의하러 부두에 나갔다가 아들 셋의 유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노기 앞에서 같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자칭 우리의 보수파는 그런 신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말 보수주의자들의 엄정한 전통은 일제의 간지에 의해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더렵혀짐으로 인해, 그리고 친일잔재 청산의 좌절로 인해 계승되지 못했다. 군사독재에 의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유린당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은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참조] http://cafe.naver.com/kkuwes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


4. 오른쪽 날개와 지역감정

절대권력은 절대타락 한다고 했던가.

우리나라의 좌익, 진보세력 씨가 말라 버린 후 우익만 득세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형성되었지만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곧 우익도 씨가 마르고 극우 수구주의 절대권력이 판을 치다가 그 권력이 ‘절대타락’한 형태가 바로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동서 지역감정에 의한 남북분단에 의한 ‘동서분단’이다.

생각해 보라, 똑같은 색깔, 똑같은 주의주장을 내세운 우익 보수주의의 일색이 된 나라에서 여당과 야당이 무슨 색깔로 서로를 차별화할 수 있을까? 이념도 같고 정책도 같고 주의 주장이 같고 암튼 모든게 다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그 정당의 당수가 태어난 지역과 당의 지지 지역만 달랐다. 그렇다. 지역색이다! 쌍둥이 보수당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차이는 지역 색 뿐이었던 것이다. 여야를 식별할 수 있는 이 색깔을 발견한 후 그들은 거기에 정치 생명을 걸었고 이후 한국 근대 정치사는 총론은 ‘분단’, 각론은 ‘지역감정’으로 메꿔지게 된다.

혹자는 작은 땅덩어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억울한데 다시 동서가 ‘분단’되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며 남북통일을 이루자면 먼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동서화합부터 이루자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서분단’을 얕잡아본 말이다. ‘동서분단’의 뿌리를 알면 결코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서분단’의 뿌리가 바로 ‘남북분단’에 있기 때문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남북분단에 의한 진보(좌익)세력의 초토화로 인해 우리나라 정치판이 우익일색으로 뒤덮이자 이를 윤색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역색이 조장되어 ‘동서분단’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동서화합부터 이루자는 주장은 일면 논리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며, ‘동서분단’의 역사적인 내력을 따져 본다면 오히려 동서화합을 위해, “‘동서분단을’ 조장한 남북분단을 끝장내자” 라는 주장이 더 논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감정의 이런 깊은 뿌리를 망각하고서 경상도에 정치적 기반을 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대연정을 이뤄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극복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감정 극복 방안은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철학적 고찰이 일천함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노 대통령 스스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좌에서 우로 폭이 넓고, 서로 중첩되므로 두당 간에 이념적 차이는 서로 없다’고 함으로써, 두 당의 차이는 지지 지역차이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인데 그렇다면 그처럼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정당이 왜 색깔(이념)별로 각기 분화하지 못하고 잡탕식으로 두 정당 안에 동거하고 있는지 그 모순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진 못했을까?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에 잡탕으로 눌러 붙어 있는 보혁세력들을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으로 헤쳐 모여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전국적인 진보정당과 역시 전국적인 보수정당이 탄생하도록 해서, 좌우 양 날개로 창공을 자유롭게 나르는 새들처럼 우리나라도 이제 우익 한쪽으로만 퍼덕거렸던 뒤틀린 정치사를 청산하고 건강한 좌우익, 보혁세력이 조화를 이뤄 튼실하게 미래로 나르는 그런 새로운 정치사를 쓰게 할 수는 없었을까?

(보혁이 헤쳐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가보안법 철폐다. 정당의 보혁구도를 가로막은 것은 역사적으로 고증해 보아도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확실하므로 이것은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감정 타파를 위한 일관된 정치여정을 걸어온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대통령의 진정성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폭넓은 정치 스펙트럼을 갖는 정당들을 그대로 떠안고 한나라당과 열린당, 혹은 영호남 정치세력이 대연정을 이루는 것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보안법으로 좌익이 사라진 환경에서 우익들이 우익 일색인 민망한 현상을 윤색시키려고 망국적인 지역색을 조장했던 것인데 그 원인을 그대로 둔 채 이번엔 지방색이 보기 싫다며 지방색을 억지로 한 색깔로 윤색시키는 대연정을 제안한 셈인데 그렇게 된다면 기존의 우익 일색에 지방색 일색까지 가세하여 그 민망함은 두배로 커질 터이니 이 민망함을 윤색시키려는 욕구도 두배로 커져 지방색 보다 더 진한 제3의 색깔이 금방 등장할 텐데 그렇게 되면 이제 그 제3의 색은 정녕 뭘로 윤색시킬 수 있다는 것인지, 그 해답을 제시한다면 나도 대연정을 도시락 싸가지고 따라다니며 지지할 것이다.


5.마무리 짓는 말

민족 분단은 이산가족들에게만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 아니다.

민족분단과 그로인한 국가보안법으로 말미암아 우익과 그 이념이 득세하는 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만민평등에 대해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과 나눔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민족화해와 반전평화에 대하여 또 짓밟힌 여성과 환경, 이런 단어와 담론에 대하여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잊고 살아왔다. 이것이 6천만 민족을 반세기 동안 억눌러, 살았으되 산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비겁하고 쪼잔하게 숨만 겨우 할딱이며 살아있음에 스스로 모멸감을 갖게 한 남북분단이 끼친 비극이며 민족의 한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비단 유신이나 군사독재 시절만의 얘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붉은 딱지를 붙이기 쉬운 진보와 좌익의 단어 한마디, 담론 하나 하나에 언제나 보안법의 시퍼런 눈동자가 뒤를 밟고 있다. 보안법을 철폐하기로 약정했던 과반수가 넘은 정부여당 국회의원들조차 보안법의 위세에 비실비실 뒷걸음치고 대통령은 보안법과 정당의 스펙트럼의 상관 관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혹은 보안법과 정면승부가 두려움인지‘대연정’이라는‘염문’을 슬슬 흘리며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

국민들도, 107세 어머니의 한풀이에는 눈물을 흘리며 동정하면서 막상 6천만 민족의 마음을 남북으로 동으로 서로 갈갈이 찢어 발기고 있는 분단의 채찍(국가보안법)이 자기와는 상관없다며 스스로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고 있다. 맛있는 것 많이 퍼먹고, 번쩍번쩍한 차를 타고, 자고 나면 집값이 턱없이 턱,턱 오르는 크고 넓고 집에서 안락한 삶을 사는, 분단이고 나발이고 쓸데 없는 것 다 잊고 통일이 되기 전에 이미 행복해져버린 인생을 향유하는 배부른 백성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도 이런 국민들처럼 '배부른' 대통령이 되어 버렸다는데 있다. 노 대통령은 동서갈등의 깊은 골이 왜 패였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연정이란 이름으로 특정 지역기반 정당과 손잡고 오는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일, 이백명의 지역색만 탈색시키면 지역감정이 사라질 것으로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비록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표이긴 해도 닳을대로 닳은 정치인 이 삼백명의 놀놀한 마음과 4천7백만 국민들의 가슴에 서린 천추의 한은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 천갈래 만갈래 찢겨 있는 국민의 마음을 그대로 둔체 총선 표심만 일시적으로 메꾸려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동서화합을 이룬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싶거든, 노 대통령은 외세에 의해서든 동족에 의해서든 분단 60년 동안 국민의 가슴에서 찢어낸 나머지 한쪽, 왼쪽 날개를 국민들에게 되돌려 주기 바란다. 그래서 국민들의 찢긴 가슴이 치유되고 나라가 좌우 날개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면 한줌도 안되는 국회의원 이,삼백명의 지역색은 이제 논할 가치도 없게될 것이다.

대통령 직을 걸려면 마땅히 4천7백만의 가슴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이런 고귀한 일에 걸어야 한다.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한줌도 안되는 국회의원들과, 지역주의에 둥지를 튼 병든 정당이에 순수한 열정을 받치는 것은 민족과 역사에 대한 대통령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대통령 스스로를 저버리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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