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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 재희가 들어간다. 재희는 비어있는 공간에 들어가서 마치 자신의 공간인 것 마냥 살아간다. 아니, 그 공간이 자신의 공간이다. 따로 있지 않다. 그만의 공간, 혹은 그의 집이라는 것은 없다. 그가 빌려들어가는 집이 곧 그의 집이다. 그는 그러한 공간들에서 아이의 삶, 젊은이의 삶, 부부의 삶, 그리고 삶의 마지막, 곧 죽음까지 경험한다. 즉, 인생을 모두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그가 될 것은 무엇인가? 유령이다. 공간이 따로 필요하지 않은 존재, 유령이 되는 것만이 그가 존재하는 방법이다.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이들에게 그들의 집은 더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타인(타자)이 침입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예전같지 않으며 그 타자와 타협하거나 공존하지 않는한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이미 일격을 당한 후이기 때문이다. 사진 작가의 집에는 사진없이 액자만 걸려있고, 권투선수의 집에서는 얼굴 사진의 눈 부분이 가려진다. 사람들은 뭔가 다른 시선을 느끼고 불가해한 감정(uncannyness)을 느낀다. 그나마 유일하게 공존 혹은 타협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가장 동양적인 한옥이다.
재희는 비극적 인물이다. 비극적 인물은 자리정하기(positioning)에 거부한다. 햄릿은 전통(Hamlet Sr)이 정한 역할(role, position)을 거부했다, 혹은 고민했다. 오이디푸스(Oedipus Rex)는 신탁에 저항하며 고린트의 왕자로 남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는 죽는다, 그러나 그는 죽는 자리를 보이지 않고서. 마치 유령처럼 사라진다. 이러한 비극적 인물들의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은 대체로 실패로 끝나면서 평범한 우리들에게 도덕률(moral or ethics)을 준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비극론은 말해왔다.
영웅이나 비범한 인물들도 이러한 질서에 저항하다가 실패하는데 하물며 우리야 하는 식의 설명이다. 그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재희는 일반적인 비극적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 혹은 유령으로의 전이는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빈집과도 같은 승연의 남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살게 되기 때문이며, 그(타자)의 침입을 당했던 집(공간)들은 이미 '타자의 응시'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공존이라는 관점에서 다시보면 승연의 남편이라는 자아에 재희라는 타자가 들어와 '함께'사는 것이며, 안전했던 공간에 타자가 들어와 응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타자와 함께 사는 자아는 과연 행복할까? 거꾸로 생각해보자. 자아만이 있는 자아는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그것을 보여주는 인물이 승연의 남편이다. 자아에 자아만이 가득차서 넘치던 그는 재희와 함께 있음으로서만 승연과 함께 행복해진다. 마지막 식사 장면의 남편은 바보가 아니다. 진정 행복한 자다. 재희와 그는 따로가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하자.
타자를 받아들이자.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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