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3 : 무척 식상한 명절이야기

웃어라 명절

검토 완료

육성철(ysreporter)등록 2005.10.31 18:35
한국여성민우회는 1999년 여성의 생활 속 성차별을 알아보고 그 대안을 만들어 가기 위한 ‘나의 여성차별 드러내기’ 수첩 활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2000여 건에 달하는 생생한 차별 체험을 수집할 수 있었다. 차별 사례를 분석한 결과 여성은 ‘명절과 제사상의 성차별’을 가장 큰 생활 속 차별로 꼽았다. 여성이 가장 설움을 느끼는 날이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명절’인 것이다.
성차별적인 명절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1999년 추석을 필두로 이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명절과 제사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한 적이 없었던 터라 적잖은 저항이 예상됐지만 거리 캠페인에서 만나는 수많은 분들이 기대 이상으로 공감해 주었다.

|||||||||||||||||||2000년에는 ‘웃는 명절을 찾습니다’라는 공모를 통해 이전의 명절문화를 넘어서는 대안명절의 실천 사례를 찾아보았다. 2001년에는 명절이 ‘다양성과 열린 문화’로 자리잡고 모두 함께 즐거운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함을 제안했다. 그리고 역사 속 명절을 돌아보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관습과 전례에 ‘갇힌 명절’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평등한 ‘열린 명절’을 만들고자 했다. 2002년에는 ‘바뀐 명절을 찾아라’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를 통해 성차별적인 명절을 드러내고 평등한 명절로 가는 변화의 지점을 모색했다. 2003년 인천 캠페인 때 벌였던 ‘남성들이여, 설거지부터 시작하자!’ 는 남성 실천 서약운동에는 많은 남성이 참여해 아내에게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역할분담을 엽서로 써서 보냈다. 2004~2005년은 각 구(區)의 주요 지점을 정해 릴레이식 캠페인을 벌였다. 이는 시민에게 한발 다가서는 현장성을 경험하고 시민의 의식 변화를 실제로 체험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명절을 보내는 사람이 너나없이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 불만이 없다. 여자쪽 가족과 남자쪽 가족을 고루 배려하면 불평이 없다. 여성민우회가 1999년 이후 ‘웃어라 명절’ 캠페인을 벌이면서 평등 명절을 실천하는 다양한 사례를 수집하면서 현장에서 구체적인 변화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한 가지 결심했는데 형님하고 사이좋게 지내야겠다는 것이었죠. 동지애가 느껴졌고 처지도 비슷하고 내가 아랫사람이라서 형님이 이끌면 뒤에서 보조하고 일할 때 한번이라도 먼저 나서야겠다 생각했어요. 명절 때 음식을 절반씩 나누어서 해가고 필요한 것은 장을 보는 데 돈은 똑같이 냅니다. 명절 전날 시아주버님은 부모님과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 가시고 형님과 저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금 비싸도 다듬어진 채소를 사고 남는 시간에는 노래방에 가서 함께 노래도 부릅니다.”
“지난 설날 차례상을 물리고 아침밥을 먹은 후 세 명의 며느리와 시누이, 대학생인 조카까지 어머니를 제외한 우리 집 모든 여자들이 영화관 출동. 영화를 본 후 차 한잔과 수다꽃을 피우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남자들은 바둑, 낮잠, 어린아이 돌보느라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도 모처럼 형제들끼리 얼굴 맞대니 화기애애. 여자들의 집단외출을 묵인했지만 어머니는 당신 아들 끼니 거른다고 안절부절. 하지만 내색 않고 속으로만 불편해하신다. 저녁 먹고 온 가족이 동네 노래방 가서 소화 겸 가족 노래경연. 이렇듯 즐거운 명절이 되기까지 큰 형님을 비롯한 며느리들의 노력이 컸다. 명절이 어느 한쪽만을 힘겹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 가족의 명절은 단번에 된 것도 아니고 세대를 넘어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점차 극복되었다.”
평등 명절이 옳다는 의식의 확산과 더불어 가족간에 타협점을 찾는 것이 명절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초석이 된다. 물론 지속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여성의 단결이 열쇠다.
민우회를 통해 수집된 명절 문화 변화 사례와 ‘웃는 명절’을 위한 대안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시부모 세대의 결단
평등 명절의 최대 걸림돌로 시어머니가 꼽혔다. 도우려는 아들에게 “어디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냐”는 노골적 가로막기형, “내가하마, 걱정마라”는 과잉보호형, “애비 전 부친 것 좀 먼저 갖다 줘라”며 익애하는 모정형, “나는 자식들 그리 안 키웠다”는 문화적 우월감의 봉쇄형 등이 있다.
다음은 시아버지로, “에헴”하고 겉으로는 티내지 않지만 남성우월주의를 완강히 고집하는 배후실존형, 아들-며느리의 행태에 대해 시어머니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리모콘형, 작은 변화의 시도에 대해 아무 반응이 없는 묵묵부답형, 며느리들이 애처로워도 그저 말로만 “수고한다”고 하는 심정적 동조형, 시어머니의 가부장권 대행에 쐐기를 박는 아주 극소수의 민주적 파쇼형 등이 있다.
명절이 선대를 위한 의례인 만큼 그 변화도 부모 세대가 주도할 때 실현 가능성이 높다. 귀성 교통체증으로 시부모가 자식들 있는 곳으로 올라오는 사례, 자식들이 명절에 내려오면 당일만 함께 보내고 시부모가 친목계 여행을 가는 사례 등이 있다.
“삼형제의 맏며느리인데 주도권을 갖고 계신 어머니께서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세요. 그래서 남편들도 만두빚기나 밤까기, 기름질을 함께 합니다. 맏며느리의 애로사항을 많이 이해해 주시는 시어머님은 후에 우리 세대가 주도권을 갖게 되면 너희 뜻대로 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 여성들끼리의 단결사례
“큰동서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데 친정이 근처여도 잘 가지 못한다. 명절준비도 먼저 해 놓는 등 일이 많은 점을 고려, 다른 며느리들이 나서서 먼저 친정에 가게 한다. 며느리들이 의리를 보인 것이다.”
며느리들끼리 단결해서 친정에 가는 순번을 정하거나 한 사람씩 돌아가며 친정에 먼저 보내게 하는 방법이 있다.

● 다양한 가족의 주체적 변화사례
“한부모들끼리 장소를 하나 빌려서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는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명절 전날에 떡도 하고 아이들과 같이 놀면서 3박4일 보낼 예정.”
“친하게 지내는 한부모끼리 누구네 집에 모여서 어른끼리 아이들끼리 같이 전도 부치고 밥도 해먹고 윷놀이도 하고 노래방에도 갔다.”
“결혼 안 한 친구들끼리 모여서 명절 여행단을 짰다. 명절 연휴마다 함께 놀러간다. 명절이 이젠 기다려진다.”
가족 중심주의에서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처지에 맞는 명절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

● 의식의 변화
“명절 문화를 바꾸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개인이 실천하기에는 참 힘들다. 그래서 운동을 더 활발히 전개, 사회적으로 이슈화해야 한다.”
명절문화의 변화를 주장하는 며느리들을 두고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다, 아들들이 줏대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가부장적 의식구조에서 나온 말이다.
“민방위 경보처럼 12시에 사이렌을 불어서 친정-시집 교대했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사회적 규범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자는 요구다.

21세기는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명절문화를 만드는 우리 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 차원의 변화 욕구와 작은 실천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 규범들이 마련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여론을 조성하는 지속적인 운동을 펼쳐서 개인적이고 개별단위적인 실천에 더하여 공동체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가 변하면 풍속도 변하게 마련이다. 명절의 차례는 조상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담으면 된다. 친족법 개정으로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으니 조상을 섬기는 제사도 똑같이 모시는 것도 이제는 생각해 볼 때다. 역사적 전통에도 윤회봉사라고 해서 특정 제사를 자손들간에 해마다 돌아가면서 지내는 방법과 아들, 딸, 손자 등 자손들이 그들 선조 제사 가운데 특정 제사를 맡아 제사의 준비 및 기타 제반 사항을 전담하는 분할봉가사 있다. 특정인의 제사를 전담하면 그 사람은 평생 그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딸도 친정부모를 섬기고, 혈연 중심의 명절 지내기를 극복하고 이제는 새로운 공동체적 대안 명절 문화 만들기를 이제는 시작할 때이다.

● 웃어라 명절!
많은 여성이 ‘명절’하면 떠올리는 것은 “여자들은 죽어라 음식 장만해 차려내고 남자들은 먹고, 마시고, 자고, 여자들은 명절 치르고 며칠 몸져눕는 것”이라고 한다. 여성의 가사노동이 단기간에 집중되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혈연 중심의 관습과 관례에 갇힌 명절문화는 가족들이 모여 정을 나누고 함께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즐거움보다는 부담스러운 행사가 되어 명절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다함께 즐거운 명절을 위해 그동안 꾸준히 전개해 온 ‘웃어라 명절!’ 캠페인을 통해 현장에서 생생하게 전해오는 메시지는 새로운 명절문화, 평등한 명절문화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작은 실천들이 쌓여서 변화의 물꼬가 터지고 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논다’,
‘여자는 차례, 남자는 가사노동에 참여한다’,
‘일보다는 놀이에 치중한다’,
‘폐쇄적인 남성 중심 가족주의를 깬다.’
평등한 명절을 위한 첫걸음은 힘겨웠지만 그리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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