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신드롬'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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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원(dutscheong)등록 2005.12.08 15:20
‘황우석 신드롬’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생각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논문과 관련한 MBC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PD수첩의 문제 제기로 인해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간의 우리 과학기술은 가히 세계가 놀랄 만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자동차, 조선, 반도체에다 최근엔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국민으로선 참으로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우석 교수 연구팀의 논문 진위와 난자세포 출처에 대해 PD수첩 제작진이 취재과정에서 연구원들을 강압적으로 인터뷰한 잘못은, 아무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언론의 사명감에 불탔다 하더라도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MBC는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내고, 이에 따른 후속 조치까지 나올 것 같다. 그러나 PD수첩과 MBC에 대한 여론의 질타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조짐이다. 이참에 우리 사회가 모든 잘못을 온통 PD수첩에만 있는 것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처사인지 함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개인적으로 황우석 교수가 그동안 남다른 노력으로 일구어낸 그 분야의 뛰어난 업적을 조금도 폄하하거나 훼손할 생각은 없다. 설령 그의 연구 결과가 이 땅의 척추장애자와 그 가족들에게 지금으로선 한낱 실날같은 희망의 빛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한’ 과학자임에 분명하기에, 오히려 가슴 뿌듯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이게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도 아쉬운 것은 연구 과정 중에 국제적 표준으로 알려진 연구 윤리를 철저히 지키지 못한 것과 언론을 통해 국민의 의혹을 사게 한 일이다. PD수첩이 취재 윤리를 위배한 것에 대해 사회적 지탄을 모면할 수 없는 것에 조금도 진배없이, 황우석 연구팀도 연구 윤리를 철저히 지켰어야 했다. 빠른 시일 내에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해명이나 검증을 해 보이는 것이 본인들이나 국민들, 국익을 위해서도 좋다고 본다.

혹자는 그간의 논쟁을 황우석 교수와 보수진영, PD수첩과 진보진영 간의 싸움으로 편을 가르며, ‘일그러진 진보주의‘라는 표현으로 이 땅의 진보진영을 폄하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의 진보주의가 이만한 일로 지탄받을 만큼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발상이 늘 우리 사회를 분열과 갈등의 늪으로 밀어 넣는 문제의 ’분열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자신이 보수적 기질이든 진보적 성향이든 어느 한 쪽에 감정적 동조를 보낼런지는 모르지만, 아직 이 문제에 대해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어느 쪽에 더 가치의 무게를 두어야 할지를 아직은 쉬 결정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은 PD수첩의 자성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와 자발적 난자세포 제공자들을 눈물겨운 애국자라 칭송하며 은근히 ’애국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대저 역사적으로 뒤틀린 ’애국주의‘와 국가주의가 우리 인간의 생명과 공동체를 얼마나 무참히도 짓밟았으며 왜곡시켜 왔던가. 모든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때 즉자적 태도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대자적 태도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황우석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업적을 쌓아 하루 빨리 가수 강원래와 같은 이 땅의 고통받는 척추장애인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고, 노벨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최근 우리 사회의 ‘황우석 신드롬’을 지켜보면서 엉뚱하게, 게르만족들의 무병장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몸뚱아리로 생체실험을 하고 기름을 짜 비누로 만들었다는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이 떠오름은 왜일까? 일제강점기 일본의 군국주의가 숱한 우리 조선인들을 잡아다 생체실험용으로 싸늘한 해부대 위에 뉘었다는 끔찍한 장면이 무섭게 뇌리를 어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지금은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난자세포의 채취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정확히 모른 채 자발적으로 기증한다고 하지만, 향후 이 연구 성과가 실용화 단계에 들어설 때 가난한 젊은 가임여성들이 단지 경제적 이유만으로 매매한 난자 세포를 이용한 치료의 혜택은 누가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베트남 전쟁을 “베트남의 가난한 농민들과 미국의 가난한 흑인청년들과의 살륙전”(우리의 가난한 농촌의 아들들도 가담하였지만)이라고 갈파한 하워드 진의 말처럼, 결국 사건의 핵심은 계급문제로 귀착되는 것은 아닐까? 미래 무병장수를 누리며, 우주여행을 하는 손님들은 오로지 세계의 부자들인 것처럼 말이다.
이번 논쟁은, 그간 급속도로 물량적 성장을 해온 탓에 우리 사회를 온통 풍미해온 도구적 이성을 ‘성찰적 이성’으로 전환해야 할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학기술의 목적과 과정은 소수 선택된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더불어 인권의 가치를 절대 우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세대의 시민권이라 불리는 의료복지 시스템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현재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소위 ‘국익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데 지속가능한 방책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심장을 겨냥한 부메랑으로 돌변할 것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참으로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가치로운 것인가 하는 올바른 판단만이 이번 논쟁을 성찰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전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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