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서 영혼이 된 홍마담과 사형에 처해지는 하용국 ⓒ MTM
공연 이야기
<강남역 네거리Ⅱ>에는 매맞는 아내, 우울증 주부, 사이비 교주, 유아 성도착증 교수,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마담이 등장한다. 정신과의사는 경찰놀이와 역할 바꾸기, 편지쓰기, 회상 여행을 하며 싸이코 드라마를 진행하여 이들을 치료하고자 하지만, 정작 미치는 건 자신이다. 극이 진행되어가면서 그들의 아픈 과거가 하나씩 드러난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의해 맞아죽은 엄마를 그리는 청연은 자신도 남편에게 맞으며 산다. 남편의 폭력에 못이겨 그녀는 칼로 남편을 찌른다. 얼굴에는 멍자국이 가득하고 표정은 늘 어둡고 그늘이 져있다.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누가 다가오기만 하면 울며 불며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하며 무릎을 꿇고 빈다.
▲ 매맞는 아내 청연과 남편역을 하는 하용국 ⓒ MTM
갱년기에 접어들어 우울증을 겪던 주부 여진은 수영장 강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그를 스토킹한다.
남편의 바람으로 신경증을 앓다가 종교에 깊이 빠지게 된 사이비 교주 영선은 ‘우주와 가까워지는 전사의 갑옷이자 여신의 제례복’이라며 이상한 야한 옷을 입고 다니며 연설을 하고 다닌다. 시종일관 코믹한 캐릭터로 ‘할렐루야’를 외치며 무대를 종횡무진해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 사이비 교주 영선의 연설하는 장면 ⓒ MTM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 홍마담은 남성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증오가 가슴깊이 배어있다. 그래서 짓궂은 짓을 하는 손님에게는 ‘거시기 달린 것들은 다 똑같다니까’하면서 병을 날려 폭력으로 경찰에 입건된다.
유아 교육학과 교수로서 아이들을 납치 및 성추행한 하용국은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6학년 때까지 집에서 살던 식모에게 성추행당한 과거가 있다.
극은 5명의 환자들이 치료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금을 긋는 자들, 자신만이 정상이라는 안일한 착각에 빠져서 자신은 금 안쪽에 있다고 믿는 정신과 의사 또한 미쳐가면서 환자들에게 죽어버리라고 외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역시 환자를 상대로 돈을 벌고 있는지라 광기를 드러내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성을 차리고는 ‘어, 손님이 왔네. 어서 오십쇼’하면서 극은 끝난다.
<강남역 네거리Ⅱ>는 이런 부조리한 인물들을 통해 현대가 앓고 있는 병의 아픈 환부를 드러냈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많은 상처들 탓인지 이러한 현대인들의 마음의 병은 극의 결말처럼, 아직도 ‘미해결’인 채로 있다.
배우 인터뷰
정신과 의사 역 조지환 (27세)
극 전체를 이끌며 배우들을 어떤 특정한 상황으로 끌고 가거나 그 흐름을 컷하는 인물이다. 아쉬움도 있지만 열심히 해서 몰입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 공연 때 누나인 조혜련 씨가 와서 둘이서 다정히 사진을 찍기도 했다.
“누나는 아무리 바빠도 이제껏 제가 공연에 출연했던 일곱 번 다 왔어요. 사실 제게 무척 냉정하고 비판적인 평가와 따끔한 질책을 아끼지 않는 '연기 선배님’이시라, 제일 무서운 존재예요.”
정신과 의사 역 이진주 (더블 캐스팅, 24세)
본래 이진주 씨는 음향 스탭 겸 정신과 의사역 언더(배우의 부재 혹은 사고시에 무대에 서는 사람)였다가 더블 캐스팅된 배우의 갑작스런 개인적인 사정으로 무대에 서게된 행운아다.
“저 때문에 공연 망칠까봐 너무 걱정이 많았어요. 제 실수를 커버해주신 다른 배우 분들이 많아서 연극 정말 혼자 하는 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 분들과 호흡 맞춰서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어요.”
매맞는 아내 ‘청연’ 역의 변정신 (48세)
연극 준비 중에는 목소리도 잘 안나와서 걱정하던 그녀. 지인들이 다녀가며 많은 격려 해줬다고 한다. 멍들은 분장 위로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에서 성취감이 느껴졌다.
“탤런트 김선영 씨가 연극보러 왔다가 꼭두 인형씬에서 정말 딸을 대하듯 해보라는 충고며 연기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저같은 부족한 사람에게요. 이만큼이라도 해낸 것에 만족하구, 더 욕심 못낼 것 같아요.”
우울증 주부 스토커 ‘여진’ 역의 육미라 (44세)
육미라씨는 이번 공연을 통해서 그동안 주로 CF를 하느라 아직까지 몰랐던 연기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사가 일단 CF 보다 많아서 호흡을 넣고 대사를 치는 방법이나 높낮이와 소리를 조절하는 것도 배웠다. 무엇보다도, 소름끼치는 스토커 연기를 하면서 대사 없이 몸과 눈빛으로 연기 하는게 ‘아 이런거구나’라고 느끼면서 배웠다고 한다. 공연 3일간 5회 전부 보러오고, 피곤한 그녀에게 온찜질 해주는 남편의 열성과 지원이 없었으면 못했을 거라고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얻은 거 배운거 느낀 거 많았어요. 위가 신경성 과민이라 계속 아팠는데도 무대에선 잊게 되더라구요.”
사이비 교주 ‘영선’ 역의 이미령 (39세)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연기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던 영선역의 이미령씨. 공연 준비 마지막 기간 보름은 매일 한시간씩 잠을 자는 하드트레이닝이었지만, 무대에 서서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시간이 뿌듯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와서 보구는 다 놀라더라구요. 평소엔 진지한데다 과묵한 편인데 나서고 설치는 연기를 하니까... 체질이라면서 이길로 쭈욱 나가라고 그러시네요. 멍석 깔아주신 스탭 분들, 이예리 연출 선생님, MTM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려요.”
‘홍마담’ 역 최영미 (26세)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고생 했지만, 돈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도 했죠. 연극보다 인생을 배운 것 같아요. 같이 공연한 배우들이 인생의 선배님들이고 내용도 중년의 이야기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분들의 애환과 고통을 조금은 알 것 같더라구요.”
실제로 그녀는 공연 내내 자기 배역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 놀이를 하는 시간에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기 했다. 단순히 ‘척하는’ 연기가 아닌 그 극 중 인물을 이해하는 진솔한 눈물이었다.
변태 교수 ‘하용국’ 역의 이병규 (40세)
이 배역에 매력을 많이 느끼고 캐릭터 분석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는 그는 변태 역 연출을 위해 형광색 팬티를 준비해 오기도 하고, ‘바바리 맨’의 설정으로 딸을 강간하는 장면을 긴 바바리 코트를 펼치는 장면으로 생각해내기도 했다.
다음에 해보고 싶은 역할을 물었더니, 여린 감성을 가진 보스 역을 꼭 해보고 싶다며 반드시 언젠가 처량하고 아픈 눈물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보여주었다.
변태 교수 ‘하용국’ 역의 박상오 (더블 캐스팅, 27세)
그는 처음에 배우로 캐스팅 되었다가 예기치 않게 <강남역 네거리Ⅱ>의 기획과 무대를 맡아서 팜플렛 제작도 손수 하고, 집에 있는 문을 떼어다가 뚝딱거리며 무대에 출입문을 만들기도 했다. 5일 밤을 새면서 배우를 비롯한 스탭 업무까지 1인 3역을 묵묵히 해내는 그의 체력과 열정은 연극과 방송에서 쌓은 10년의 경륜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연 준비하는 5일동안 매일 밤새고 마지막날 무대 정리 하고 세트 해체 한뒤, 잠 한숨 못자고 현재 제작 중(오는 4월경 방영 예정)인 KBS TV 소설 <강이 되어 만나리> 새벽 촬영을 하러 지방으로 내려가는 그의 표정에는 피곤함 보다는 새로운 의욕과 반짝거리는 눈빛이 보였다.
관객의 목소리
작품의 소재가 중년에 접어든 주부들의 이야기인지 중년층과 백발의 장년층 관객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 관객도 웃으며 볼만큼 강남역 네거리Ⅱ는 무거운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서 관객석에서는 연신 웃음이 터져나오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관객들은 정신과의사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사이비 교주의 ‘내게 강같은 평화’ 노래에 ‘할렐루야’로 화답하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 관객들을 만나 솔직한 관람평을 들었다. 다음에 또 어디서 언제 공연하는지를 묻기도 하고, ‘예술을 통한 사회 환원’이라는 무료 공연의 취지에 공감해서 선뜻 팜플렛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 우울증 스토커 여진의 자살 장면 ⓒ MTM
“홍마담과 여진이 엄마랑 딸로 역할 바꾸기 하는 장면에서 눈물도 흘리고 많이 공감했어요. 혹시나 나두 엄마한테 잘못한 거나 섭섭하게 한 건 없는지 생각해보게 되더라구요. (같이온 일행에게) 엄마, 나두 혹시 그런거 없었어? 그랬다면 미안.”
“진짜 남자들은 그 나이가 되면 마누라를 여자로 안봐요. 애들두 지들 일에 바쁘구... 극중 여진이 하는 대사 ‘니들 눈에는 내가 부엌떼기로 밖에 안보여두, 나도 간절히 사랑을 기다리는 여자라구’라는 대목에 정말 공감 했어요”
“(극중)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정말 솔직함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막되먹은 사람이 정신은 건강한 법이라’고... (웃음) 저두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한다고 하는 편인데두, 시댁 식구들에겐 그렇게 되지가 않더라구요. 그렇게 내면 얘길 꺼내서 드러내놓고 해야 할텐데 아직 우리 사회는 그런 부분을 많이 감추고 살잖아요.”
“누구에게나 나름의 상처가 있잖아요. 가족의 한명 누가 많이 아프다든지, 아주 가난하게 산다든지 하는거 주변사람한테 잘 말하지 않는 것들이 하나쯤 있어요.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홍마담이나 우울증 걸린 주부... 우리 주변에서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연극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 (정신 병원 환자)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정말 이해가 가고 공감이 되더라구요. 그런 부분을 잘 짚어서 긁어준 것 같아요.”
“뭔가 속이 시원하고 후련한 기분이예요. 내가 말못한 많은 것을 배우들이 대신 말해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배우들이 연극 마치고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사실은 제가 고마워서 인사를 하고 싶더라니까요.”
▲ 배우 연출 및 스탭과 MTM 관계자와 함께 ⓒ MTM
다녀간 관객 중에는 뮤지컬 배우 박해미, 개그우먼 조혜련, <강남역 네거리Ⅰ>의 의사를 맡았던 MBC 공채 탤런트 나성균, 영화 <찍히면 죽는다>의 김기훈 감독도 있었다. 과천 한마당 축제(과천시가 주최하는 야외극 중심의 국제 공연 예술 축제)의 이선우 예술 감독은 축제 참가를 제안하기도 했다. 연극 단체와 기업을 잇는 메세나 협의회에서도 신문 기사를 보고 연락해오면서 후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밖에도 어떤 극단의 대표도 극장에서 공연할 것을 제안하는 등, 작품성과 관객의 호응도가 좋아서인지 각 문화 예술 단체에서의 러브콜도 들어오고 있다.
<강남역 네거리Ⅱ>의 제작 과정과 공연 이야기를 담은 내용은 오는 24일 EBS 살림의 여왕을 통해 방영된다. 젊은이가 관객의 주류를 이루는 연극계에서 아직은 변방의 문화인 중년 세대의 갈등과 소외를 다룬다는 것이 의미 깊을 뿐 아니라, 새로운 관객층을 형성하는데도 한몫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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