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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다. 어디선가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려댔다. 눈길이 얼른 손목시계로 향했다. 시간은 새벽 1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건넌방 책상 위에 놓아 둔 휴대폰이었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내 몸은 어느새 건넌방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있었고 이미 소리는 신호를 넘어 거의 몸부림에 가까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전화임이 분명했다. 개인 휴대폰이 아닌 북대구 가정폭력상담소 공용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하면서 사무실에서 가지고 왔던 '그 놈'이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마는 것일까. 한번을 떨어뜨려 다시 잡은 기계 저 편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거기 가정폭력상담소죠? "
난 이럴 땐 더 차분한 목소리로 응대해야 된다고 배웠다.
"예 그렇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쉰 여인이 하는 말인즉 남편이 술만 먹으면 행패를 부리는데 오늘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늦은 시간인 줄 알면서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머지 않은 곳에 파출소도 있고 그 보다 더 가까운 지척엔 이웃도 있건만 한참이나 먼 동네에 있는 상담소에 굳이 전화한 것은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정신병원이나 요양원 같은 곳을 가르쳐 달란다. 상세한 사정을 물을 필요도 없이 ○○병원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렇게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도저히 잠을 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내 신세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 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념 속에 결국 아침을 맞고 말았다.
원래 가정폭력(家庭暴力)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 오히려 '가족폭력'(家族暴力)이라 해야 옳다. 왜냐하면 가정폭력이 가정이라는 공간 속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라기 보다는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우린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가족이라는 관계의 시작은 서로에게 생경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과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만남의 한 가운데에는 '사랑'이라는 묘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만큼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신뢰와 기대가 있었기에 마침내 주례자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어떤 이에게는 며칠이 채 못돼 '허구'인 것을 금방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 허구의 실체는 양말 한 짝 벗는 것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아내는 양말을 가지런히 벗어 세탁기에 넣어 주거나 아니 적어도 세탁하기에 좋게 벗어 놓기를 원한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양말을 완전히 뒤집어 벗은 놓은 채 아내가 그것을 다시 반듯하게 해 주길 기대한다. 결혼 14년 차인 우린 이것 때문에 지금도 싸우고 있고, 우리 싸움은 늘 이런 식이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실상은 조금도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의 번거로움을 알아주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의 세심하지 못함을 이해해주지 못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믿는다.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이브를 나중에 만드셨단다. 그런데 이 부부는 태초에 어떻게 부부싸움을 했을까 괜한 상상을 해 본다. 어느 날 아담이 말하길 "나는 이브 당신보다 먼저 만들어졌으니 우선 순위에서 앞서기 때문에 당신 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자 이브가 대꾸하기를 "난 아담 당신보다도 나중에 만들어졌으므로 오히려 훨씬 더 신제품이야"라고 서로 우기다가 서로 이혼법정에 갔다면 재판장인 조물주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결론은 아마도 아담의 갈비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아담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생명(심장)을 감싸고 있는 갈비뼈를 빼내 여자를 만든 것은 그 뼈가 없어서 허전하고 불완전한(?) 아담에게 여자는 갈비뼈처럼 요긴한 존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래서일까 조물주는 아담에게 이브를 데리고 와서 이유를 설명하시기를, "너를 돕는 배필이니라" 했던 것을. 그런데 종종 '돕는다'는 의미를 제각각 이해하는데서 전쟁은 시작된다. 남편은 아내가 항상 자기를 지지해 주기를 바란다. 무엇을 하든지 알아주기를 바라고 남편이 서면 같이 서야 하고 남편이 앉으면 같이 앉아야 함을 당연시 여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돕는 것 인줄 알고 있다.
특히 가부장적인 문화를 고집해 온 우리의 관습에 비추어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남편은 또 하나의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 돕는다는 의미 속에는 반대함으로 돕는 것도 포함되어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 아내의 반대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을 향한 깊은 애정의 갈비뼈 하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반대에 남편은 버럭 화부터 내고 보지만 사실 돌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내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단지 내가 보지 못한 면을 지적해주기 때문에 아내가 위대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남편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있기에 아내가 더욱 고맙고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갈비뼈'인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남편이라면 그대는 바보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저기서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현대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라는 어느 사회학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미 위기는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책임 또한 여전히 우리 가정에게 있음을 자각하면서 사랑과 행복을 생산해내는 발전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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