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은 어용 학생위원회의 관제데모였나?

28일밤 투쟁의 지도부는 시위만류 선무방송하고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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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영(bits)등록 2006.03.20 19:18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2·28결의문 첫 문장이다. 일요일 등교가 우리 역사상 야만스런 일이라는 고등학생들의 엄살은 애교로 받아들인다. 경맥 7호에 실린 이대우 학생부위원장의 「내일을 위한 투쟁」을 읽으면 뭔지 모를 의심쩍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의 글은 일반의 상식을 깨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을 분석해 보면 실제로는 별로 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지도부의 구실이 뚜렷하지 않다.

우리는 김일수 선생의 논문1에서 당시 항쟁지도부 구실을 한 학생위원회의 성격에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다. 당시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 12년 동안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기 위한 각종 집회에 수족처럼 동원되었다. 그중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만만한 동원대상자들2이었다. 학도호국단은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정권이 정권유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반공통치의 기반을 세우기 위해 만든 학생조직3이었다. 그렇다면 경북고등학교 학생위원회만 유독 어용관제학생기구가 아니라 민주학생회였을까? 그럴 리는 만무하다. 자, 그러면 2·28세대의 글과 말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 보자.

당시 긴급학생위원회 분위기4는 그들 머릿속에‘인류 역사이래 가장 횡포한 처사’였던 일요등교 사태에 대처하는 학생위원회의 더덜뭇했던5 태도를 잘 알게 해준다. 학생대표들 가운데 1학년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상외로 발언이 소극적이었다. 상당수가 부친 또는 삼촌·형이 공무원 또는 정치권내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었던 까닭도 존재했지만, 정작 학생대표들은 공포분위기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위원회가 투쟁을 이끌고 나갈 인식이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일요일 등교조치가 있은 뒤 28일까지 경북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추적해보면, 25일 1학년 1반 술렁이기 시작했고, 26일 2학년 3반 괄목할 토론이 이어지고 난 뒤, 27일 9시에야 학생위원회는 움직였다. 학생들의 여론이 아주 험악했기 때문에 학생위원회 대의원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을 모색키로 했던 것6이다. 학우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밍기적거리던 집행부가 하루를 앞두고 등 떠밀리다시피 <28일 등교 건>을 두고 긴급학생위원회가 겨우 열렸다.

학생대표들의 이 같은 미온적 태도에 학생들은 이전까지와 달리 비난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학생위원회 필요 없다’‘감시 밑에서 위압당하는 자 썩 물러서라’면서 학생위원회 무용론을 주장7하기도 했다. 강경한 어조의 학생들에게 학생위원회는 성토대상이었다. 학생대표자 토론회는 사후가 두려워 일단 단념까지 했던 간부들이 도리어 위협을 당할 만치 전학생들의 의사에 의해서 결행되었던 것이었다.



2·28 영웅으로 알려진 이대우 교수-부산대 사범대 윤리교육과-는 60년 2·28 당시 어용8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여기서 2·28의 영웅과 정면으로 맞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훈장만은 못하지만 4·19에 얹혀 건국포장까지 거머쥔 그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일요일 등교지시가 내려지던 25일부터 의거가 일어난 28일까지 항쟁의 주역들이라는 분들이 전해준 증언을 곰곰이 뜯어보면 의혹투성이다.

“이날(27일) 3학년이 없어 2학년 학생부위원장으로 위원장을 대행했던 이대우는 ‘무엇을 어떻게 해서 반항할까? 데모? 도대체 데모는 어떻게 하는가? 관제데모 말고는 해본 적이 없는데 가능할까? 만약 데모를 한다면, 그에 대한 처벌은 사형일까? 징역일까? 징역이라면 몇 년? 하는 등 갖가지 경우를 떠올리면서 등교 길에 올랐다9”고 한다. 이렇게 심약한 반공주의10에 세뇌된 학생위원회 부위원장이 어떻게 민족·민주혁명의 데모 주동자가 될 수 있었을까?

경찰 수사 발표 결과 주동자11로 지목되지 않았다면 과연 그는 2·28의 영웅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을까? 경찰수사 발표를 사실인양 받아 적는 언론의 보도관행 탓에 진상이 왜곡된 것은 아닐까?12

어떻게 우유부단했던 고등학생이 혁명을 입에 올리는 운동권으로 전향할 수 있었을까? 그건 기회주의자들의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 아닐까? 2·28을 주동했다는 이대우 교수의 증언록을 조밀하게 짜맞춰보면, 앞뒤 맞지 않는 주장이 수두룩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경황이 없는 중에 전화연락을 해서 합류키로 한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위할 뜻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허술한 시위 모의였다. 8개고 데모는커녕 3개교 시위도 어림없었다. 동인동 냉돌방에서 거사모의가 있던 밤, 3개 고교 대표학생들이 “천당에서 만나자”는 결연한 악수를 나누고 28일 거사에 나섰다13는 대목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경북고의 이대우는 “경고는 1시에 교정에 모였다. 선생님들이 나오기 전에 안효영과 나는 교단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향했다.……학교에서 출발하기 전에 대구고 손진홍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14”고 주장하고, 대구고의 학생위원회 손진홍 부위원장의 증언15은 이대우가 시위할 뜻을 정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했다고 전했다. 이대우는 28일 새벽에도 시위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28일 시위계획은 “교문을 나서는 상당수의 학생들은 28일 시위를 통해 한꺼번에 폭발을 시키기로 다짐했다”16는 것과 “27일 밤 데모 모의에서 경북고와 대구고는 데모결행 1시간을 상호간에 전화로 연락, 시간을 맞추기로 하고 반월당에서 양 학교의 데모대를 합류키로 합의했다는17 것인데, 대구고등학교 서동활의 증언18은 사뭇 다르다. 이대우는 1시 궐기설을, 서동활은 10시 궐기설을 각각 주장해 일요일 연합시위 모의부터 삐거덕거렸다. 준비 면에서는 시위계획의 구체성을 띠었던 대구고등이 좌고우면했던 이대우의 경북고등을 능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사 모의 시작부터 28일 시위가 있기까지 톺아본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은 개인플레이에 열중이었다. 시위를 조직화할 학생지도자다운 깜냥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28일밤 투쟁의 지도부는 시위만류 선무방송하고 다녀



어쨌거나 그들은 데모한 학생들을 구속하거나 교사들에 대한 인사조치가 있을 경우 데모를 계속할 것이라고 피의 맹세를 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밤에 경찰차를 타고 선무방송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왜 그는 사건 당일 밤 경찰의 꾐에 빠져 선무방송 차량을 타고 시위에 한창인 학우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19하고 다니며 궐기를 부정한 행위에 대해서는 고백하지 않는 것일까?

연합전선을 구축, ‘피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는 학생부위원장의 28일 밤 처신은 건국포장20을 박탈해야 할 지경이다. 강제등교 조치에 맨 주먹 흰 가슴으로 항거했던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아직 그날 투쟁의 불길을 당긴 주역이 순결한 백합의 청춘처럼 살아있는데, 아무도 모르라고 혼자 영웅행세를 하고 계실까? 궁금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28의 또 다른 주역 장주효 선생은 70년 2월 28일 의거 10주년 매일신문 특집 「기성에 끼어든 2·28의 주역들 피맺힌 증언」에서 “내 생애에 구속학생을 석방시키기 위해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을 했다. 장선생은 술렁이는 학생들을 가라앉히면 연행학생을 석방한다는 경찰간부의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고마우신 경찰아저씨 보호 아래 우리는 아무 걱정 없다」는 내용으로 방송하면서 학생들을 귀가시켰다고 한다. 진정한 2·28정신은 부끄러운 고백 속에 살아 있지, 영웅대접 받으려고 부패비리사업 가릴 줄 모르고 2·28만 대한민국 최고로 알고 제 분수모르고 추진하는 뽐내기식 사업 확장21에 깃들어 있진 않다.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하는 것이 청년학도들의 기백”22이라고 해놓고는 줄행랑을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오늘날까지 그가 영웅행세를 할 수 있었을까? 그래놓고는 “결코 우리는 이것으로서 우리가 자랑한다든가 분에 넘친 긍지로서 타의 칭찬을 들으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는 것23”이라고 해놓고는 혼자서 슬그머니 건국포장까지 챙겼다. 시위에 나섰던 고등학생이 경찰에 붙잡혀 차량을 타고 시위를 중단해달라고 선무방송을 한 것은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비열하게 그런 사실을 숨기는 것이 나쁜 것 아닌가. 이대우 교수는 뻔뻔스럽게도 3·1운동 지도들의 비폭력 투쟁노선을 비판24하고 나서 우리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이분의 말씀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당시 보안법 파동, 2·4파동 등 이승만은 국민의 목을 죄고 있었으므로 학생간부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생각하고 문제의 기회만 주어지면 폭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었다25”는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자.

당시 경찰과 수습회의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사대부고등학교의 두 간부 또한 군자답지 못하게 일그러진 영웅행각을 하고 있다. 그날 밤의 부끄러운 처신에 대해 입을 다물고 딱 잡아떼고 있으나 우리는 그들의 입을 통해 그들이 한 일을 알아버렸다. 2·28 영웅들의 본색은 경찰들에게 속아 넘어간 순간 꾀죄죄해졌다.



『2·28민주운동사』 책임 집필자인 김태일 교수의 주장처럼 “2·28은 그 발단에서부터 전개 과정 전체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된 것26”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북사대부고생 박재철의 글처럼 “몇몇 학생들은 모여 모의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모의한 대로는 조금도 진행되지 않았고 부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던 것”27이었다. 이대우 교수는「내일을 위한 투쟁」에서 집결장소 반월당→경북고등은 뛰어가면서 대구상고와 사대부고 학생들을 합세케 하고 대구고는 바로 직선으로 달려와 반월당에 집결하기로 했다(3권, 48쪽)고 했으나, 시위는 경북고등학교의 단독시위로 결행되었다.「부고 학생들에게 정의의 대열에 뛰어들라」고 외쳐 보았으나 반응이 없었으며 담벼락에서 내려다보는 몇몇 학생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고28 하니, 8개교 연합시위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2·28은 이웃한 학교와도 손발을 못맞춘 채 거사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경고생들에 의해 폭발해 버렸다. 이들이 우유부단했던 학생위원회를 투쟁의 대오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불의에 항거하는 순정한 항거는 골 복잡하게 계획하거나 계산된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8개교연합시위라는 말은 개념탑재가 안된 호사가들의 어불성설이거나 4·19가 성공한 뒤 부풀리기나 의미 만들기가 필요해지자 사후에 거사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짜맞추기한 의혹이 짙다고 하겠다.

왜 그들의 거사는 일사분란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조직운동 차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28 그것은 우연성과 우발성에 의해 분노가 조직되었던 것이었다. 의로운 분노가 가진 결속력의 승리였다. 일요일 등교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학생위원회는 학생여론에 끌려 다녔다. 당일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기까지 학생위원회 부위원장의 동태는 벼락치기 데모준비29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우리는 성공한 4·19의 후광을 크게 입은 2·28 영웅의 말을 얼마만큼 믿을 수 있을까.

일요등교 거부를 비합법 학생기구도 아닌 경북고등학교 학도호국단 학생위원회 부위원장이 “자유당의 정치악에 정면으로 도전하자”고 했다는 대구문화예술회관 홍종흠 관장의 주장 또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그 역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학생들의 거룩한 피가 지성정객들의 더러운 손에서 농락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30는 그의 글을 떠올린다. 학생들의 거룩한 분노가 영웅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의 품 안에서 2·28이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28기념사업회는 필자가 제기한 의혹에 대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가필인지를 솔직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우연성이 폭발한 2·28을 미화하지 말자. 자신의 입으로 관제데모밖에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어떻게 민주의거의 주동자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이 부분 석연찮은 대목이다. 2·28이 민주운동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학도호국단을 민주학생회로 바꿨다는 싸움의 기록을 제시해야 할 것 아닌가. 2·28이 성공하고 나서 대학생운동권으로 성장했다 민중운동, 시민운동이 아니면 우리사회의 음지를 밝히는 일을 하며 살았다면 모를까, 평생 양지에서 곡필이나 일삼는 ‘지방조선’신문사 논설위원, 2·28기념사업에 팔짱끼고 있다가 된다 싶으니 쥐새끼처럼 나서 의장자리가지 챙겨먹는 ‘멍에주필, 지역경제가 엉망진창이 되도록 상공회의소 뒤나 봐주고 살아오신 분이 민주화 거들먹대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화투쟁은 참으로 존귀한 가치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2·28정신은 완전한 학교 민주화와 자유화 실현에



대구는 2·28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는가? 2·28이 일어났는데 지금 대구는 사립학교의 부정부패와 전횡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관선이사가 파견된 사고재단이 가장 많은 곳이다. 오죽하면 사립학교법 개정이 한나라당의 아성인 대구의 사랍학교들 때문에 생겨났다는 말까지 떠돌까. 2·28세대의 자존심 뭉개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대구가 자랑하는 2·28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했던 2·28세대가 언제 한번 추상같은 목소리로 지역 사립학교의 전횡에 대해서 꾸짖은 적이 있었던가. 2·28을 이끌던 시절의 어른들에 비하면 많이 배우고 잘난 당신들께서는 어른 노릇에는 한참 서툴렀다. 2·28세대가 제 역할을 했다면 최소한 지역혁신을 가로막는 사랍학교 재단의 병폐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어머, 지역사회지도층으로 자란 2·28 슨상님들 하는 꼬락서니 좀 보소. 살만한 인간들이 발행하는 지역신문의 주필이라는 작자는 글 쓸 날만 되면 만날 대통령을 갖고 논다. 대구의 몰락은 응당 자성할 줄 모르고 남 탓만 해대는 정신의 일그러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늙음이 두려운 것은 나이 먹을수록 진실로부터 멀어져 가기 때문일까? 2·28기념사업회는 대구정신의 밥그릇을 내동댕이친 부끄러운 선배들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화운동에 이바지했다는 과거지사를 배경으로 궁물타령을 하는 ‘궁물연대’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2·28 기념사업회는 보존가치보다는 청산가치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들은 운동의 기득권화를 통해 대구사회에 독버섯처럼 똬리를 틀었다. 2·28은 대구학생민주의거였으나 2·28기념사업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아니다. 대구상고에 다니던 2·28세대 서울대학교 김수행 선생은 97년 2·28민주의거 37주년기념 심포지엄에서 “고등학생들의 저항운동이 미친 영향을 지나치게 미화해서는 곤란하다31”고 했다. 행여 대구시 교육청에서 2·28을 ‘민주주의 시대의 토양을 다진 것’이라고 과장 교육할 것을 예견해서인지, “만약 대구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독재에 저항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면 왜 박정희나 노태우 정권에 대해서는 저항하지 않았냐고 되물어볼 수 있을 것32”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2·28을 짓밟은 군부정권의 아성으로 박뽕 맞은 고향대구를 향해 2·28 민주의거에 참여했으면서도 민중운동을 반대하는 세력은 민주세력이 아니라고 생각33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불의와 싸우지 않는 2·28세대는 민주주의의 걸림돌로 늙어버렸다. 2·28세대여, 2·28의 주인공에게 기념사업을 물려주라.

의거 1년 뒤 3만 명이 기념하던 2·28은 오늘 백 명도 안 되는 어제의 하루살이 운동권들이 독차지했다. 61년 2월 17일 영남일보는「학생자치적으로 행사, 2·28 관제와 형식 배격」 제하에 “2·28 기념탑 건립 자체를 바라지 않으며, 많은 학생들이 학비도 못내는 형편에 학생들에게 건립비를 강제 징수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관이나 교장이 기념비를 건립한다는 것은 아부근성의 발로이며, 이는 4월혁명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므로 이를 결사반대한다”는 보도를 했다. 이름 모를 자랑스런 선배들의 속 깊은 생각이 우리마음을 싸하게 한다. 대구정신이 살아있을 무렵 우리의 선배들은 그렇게 통 크게 살았다.

나는 살아있던 날의 2·28기념행사 추진위원회는 중고등학교 학생대표 40여명과 대학생 대표 15명이 모여 진행했다는 사실을 빛바랜 신문에서 찾아 읽었다. 2·28세대가 타락하기 전 청소년 시절 참따랗게 기능했던 2·28기념행사 추진위원회를 복원시키는 것이 2·28의 역사성을 살리는 길이다. 자신들의 깃발을 찢어버린 박정희 정권과 손을 잡은 과오로 시르죽어가는 대구의 자라나는 중고등학생들이라도, 자랑스러웠던 선배 덕에 다른 지역 청소년에 비하면 파격적인 특혜를 누리도록 2·28기념사업회에 줄 돈이 있으면 청소년이 중심이 된 2·28기념행사 추진위원회를 되살려 지원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방정부가 못하면 중앙정부라도 역사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

빼앗긴 2·28의 대구정신. 4·19를 이끌었다는 2·28사람들이 제 잇속 쫓아 4·19를 무너뜨린 박정희에게는 일언반구 저항도 하지 못한 주제에 자신들이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추태부리는 꼴을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2·28기념사업회와 그 주인공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사관은 이제 그만 2·28에서 끝내야 한다. 2·28을 이끈 주역은 이름 없는 대구의 학생들이었다. 역시나 “우리가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 저리 우리들의 태양이 작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어제의 하루살이 운동권들이 대구정신을 대표하기에 그들의 이념은 너무 낡았다. 인생 말년에 노욕 든 2·28은 죽었다! 2·28세대의 집단 자기반성을 촉구한다. 또한 시민사회에서도 2·28기념사업회를 운동권 형님 모시듯 수수방관하지 말고 대구정신의 기강을 바로잡다는 뜻에서 적절한 감시와 비판을 해주기 바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대구를 빛내고 사라진 2·28의 진짜 주인공들과 그 용기 있는 날들의 대구정신이 그립다. ‘신라인의 마음’을 달구벌 메나리조로 부르노라. 강한 자를 정의롭게 하거나 정의로운 자를 강하게 하거나, 수구세력에게 투항한 2·28을 죽여야 대구가 산다. 2·28 세대의 쇠잔은 역사의 순리이다.



- 대구민예총에서 발행하는『온장』에 싣기 위한 쓴 글입니다. 대자보 독자들께서도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다음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대해 한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미주



1.「2·28의 4·19 민주운동으로의 계승」, 『2·28민주운동사』 자료집1권, 126~127쪽

2. 자유당과 학도호국단이 동원한 대표적인 학생궐기대회는 북진통일 학생궐기대회(1953), 휴전반대 학생궐기대회(1953), 미군철수반대 궐기대회(1954), 친공 유엔조사단 축출 궐기대회(1955), 학생 반공궐기대회 및 시위(1956), 북한봉기 지원대회(1956), 리승만 박사 재출마요구 궐기대회(1957), 인도네시아의 반공혁명 지지대회(1958), 재일 교포 북송반대 궐기대회(1959) 등이었다고 한다. 윤순갑, 「2·28민주운동의 배경」, 83쪽

3. 학도호국단은 “공산당의 준동으로 야기된 학원의 혼란을 제거하고 학도층의 사상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었다. “2·28민주운동 이후 학원에서는 관제호국단을 철폐하고 자치학생위원회를 건립하기 위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고. 학원의 완전한 자유를 논하고 학도호국단 해체를 논하기 시작한 것은 4·19를 지나면서 비롯된다. 학원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치학생회 조직은 그해 5월에 접어들면서 본격 추진되었다. 학도호국단은 1950년 5월 3일 국무회의를 거쳐 5월 10일 대통령령 제 1573호를 폐지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김일수, 「2·28의 4·19 민주운동으로의 계승」, 126쪽>

4. 다음은 학도호국단=학생위원회의 성격을 알게 해주는 대목. “학생대표들의 이 같은 미온적 태도에 학생들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비난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학생위원회도 필요 없다’ 감시 밑에서 위압당하는 자 물러서라‘면서 학생위원회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홍종흠, 앞의 책 364쪽>

5 더덜뭇하다 : 결단성이나 다잡는 힘이 모자라다.

6. 오창균, 「2·28민주운동의 전개과정」 1권 사론편, 92쪽

7. 홍종흠, 『2·28민주운동사』 2권 자료편, 364쪽

8. 자유당과 학도호국단이 동원한 대표적인 학생궐기대회는 북진통일 학생궐기대회(1953), 휴전반대 학생궐기대회(1953), 미군철수반대 궐기대회(1954), 친공 유엔조사단 축출 궐기대회(1955), 학생 반공궐기대회 및 시위(1956), 북한봉기 지원대회(1956), 리승만 박사 재출마요구 궐기대회(1957), 인도네시아의 반공혁명 지지대회(1958), 재일 교포 북송반대 궐기대회(1959) 등이었다. 윤순갑, 「『2·28민주운동의 배경』, 『2·28민주운동사』, 83쪽

9. 홍종흠, 『2·28민주운동사』 2권 자료편, 363쪽

10. 제국주의에 항거하고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백의인의 고결한 민족정기가 누적된 부정 앞에 드디어는 노한 경고의 사자들이 학원의 문을 뛰쳐나와 폭발하고만 것이 아닌가! <이대우, 「내일을 위한 투쟁」, 자료집 2권, 228쪽>

11. 28일 하오 2시 30분 경북경찰국에서는 ‘경북고등학생의 데모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식 발표했다. 경북고등학교에서는 28일 전교학생이 극장에 단체입장하게 되었다고. 이날 하오 1시 전원 등교하기로 27일 학교측에서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28일 상오 12시 50분까지 학교에 등교했던 2백여 명의 학교 앞에서 동교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 대우군은 공휴일에도 등교시키는 폐습을 시정하자고 학생들을 선동. 2백여 학생들은 이 선동에 호응하여 경북도청에 모여들었던 것인데 경찰측의 해산종용으로 해산했으며 이날 경찰에 연행된 일부 학생들은 데모 경위를 조사받고 석방될 것이다. 그런데 주모자로 알려진 이 대우 군은 이날 하오 3시 현재 체포되지 않았다. 한편 이정용 경북경찰국장은 데모학생에 대한 조치는 주모자를 제외하고 전원 석방하겠다고 경찰의 태도를 천명하는 동시 시위 및 집회 규칙에는 저촉되나 학생의 신분인 만큼 관대한 조치를 한다고 덧붙였다.” (영남일보 60.2.29)

12. 이와 관련해서 다음 기회에 실제 228을 촉발시켰다고 겸손해하는 분의 증언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필자가 2·28기념사업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이분과 가진 솔직대담을 통해서였다.

13. “우리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둘러앉아, 「우리가 내일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천당에서나 만나자. 이제 우리들은 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이상 핏줄기가 터져 나와 죽을 때까지 투쟁을 전개하자」하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는 악수를 교환했다.“ 경북중고등학교 42회 졸업 30주년기념문집(1991) 「나의 2·28」에 나오는 이대우 교수의 이대우,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2·28민주운동사』3권, 47~48쪽

14. 「2·28 29주년 기념좌담회」(경북일보, 89년 2월 28일), 2권, 321쪽

15. “통행금지 시간을 넘어, 다시 우리는 대우군 집으로 달렸다. 대우군이나 효영군도 모두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태가지의 계획이 급변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데모는 단념하고 학교에서 결의문만을 읽고 그냥 헤어져 버리자고 한다. 주효군과 나는 분개하였다. 변경을 주장하는 대우군과 계속 관철을 주장하는 주효군과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투표로써 결정짓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손진홍, 『부정에 항거하는 젊음들』, 2권, 261쪽)

16. 2권 자료편, 365쪽

17. 2권 자료편, 366쪽

18. “플래카아드, 전단 등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고 경북고교와도 협의가 되어 10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오면 남산파출소 앞에서 양교가 합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시내로 곧장 질주해 들어가는 거다”라는 대략적인 설명을 하고는 12시 통금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 모두들 황망히 떠났다.…… 28일 정각 10시에 양교에서는 동시에 전교생들에게 결의문을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경북고교에서 시작했다는 통보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통신 방법은 50m 간격으로 서 있는 학생들의 릴레이식 완수신호 방법이었다.”(서동활, 「학원에 자유를 달라」, 『2·28민주운동사』 2권, 345쪽)

19. 『정경문화』 1984년 2월호에 게재된 홍종흠의 「2·28대구학생의거」 를 보면, “저녁 7시경, 검거된 학생들은 모두 석방됐다. 불의의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였다. 이대우·손진홍 등은 경찰에서 내준 차로 모든 학생이 석방됐다는 가두방송을 했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마음은 이로써 평온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들의 손으로 가필한 2·28정사 『2·28민주운동사』 2권 자료편 373쪽에 새겨져 있다.

20. “국가보훈처는 1960년 4·19혁명 부상자 중 건국포장을 받지 못했던 82명과 당시 혁명 및 시위를 주도한 공로자 11명 등 모두 93명에게 3일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정부는 71년 이전에 공로를 인정받은 4·19 부상자들에겐 보훈혜택과 건국포장을 모두 줬으나 72년 이후 인정받은 부상자들에 대해선 보훈혜택만 주고 건국포장을 주지 않아 형평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다 한편 부상자가 아닌 공로자로 건국포장을 받은 11명에는 경북고 재학 시절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대구 2·28시위를 주도한 이대우(李大雨) 부산대 교수와 마산고 학생운영위원장으로 4·13시위에서 핵심 역할을 한 박문달(朴文達)씨 등이 포함돼 있다.”(동아일보 2004.5.4)

21. 당시 경북일보 이필동 문화부장은 “2·28기념탑을 두류공원 광장으로 옮기고, 2․28기념광장을 만들고 기념관도 만들어, 그 정신을 심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주체자들이 소극적일 때 엉뚱한 사람들이 사사로운 목적에 이용될 수 있기에, 이에 쐐기를 박고 2·28정신이 순수하게 승화되어야 한다”(2권, 323쪽)고 했으나, 정작 2·28정신을 사사로운 목적에 악용하는 엉뚱한 사람들은 2·28세대 자신들이 아닌가. 세상에 또 이런 자뻑이 어디 있을까.

22. 「2·28결의문」, 『2·28민주운동사』 2권 자료편, 187쪽

23. 2권 자료편, 229쪽

24. “우리가 3·1운동을 꿰뚫어보면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빠리 강화조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고 패배주의에 젖어있었습니다. 33인이 독립선언문을 읽고 일경에 자수한 것도 그와 같은 사실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독립선언문에 나타났듯이 일본을 단죄하려 하지 않고 책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3인의 패배주의와 무저항주의는 그들을 투쟁 대신 즉시 투옥되기를 자원하게 한 것입니다.” <이대우, 「2·28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3권, 105쪽, 2·28 39주년기념 학술논문>

25.「2·28 29주년 기념좌담회」(경북일보, 89년 2월 28일), 2권, 320쪽

26. 김태일, 「2·28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 1권 사론편, 165쪽

27. 『2·28민주운동사』 2권 자료편, 273쪽

28. 오창균, 「2·28 민주운동의 전개과정」, 『2·28민주운동사』,97쪽

29. 『2·28민주운동사』3권, 48~49쪽

30. 이대우, 「내일을 위한 투쟁」, 『2·28민주운동사』

31.「228민주의거 37주년기념 심포지엄 토론중계」, 『2·28민주운동사』3권, 71쪽

32.「228민주의거 37주년기념 심포지엄 토론중계」, 『2·28민주운동사』3권, 70쪽

33.「228민주의거 37주년기념 심포지엄 토론중계」, 『2·28민주운동사』3권,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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