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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적 대결의식 극복해야 새로운 운동이다
1. 시국인식에 대한 기성세대의 분노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동기를 살펴보면 앞글에서 말한 바와 같은 현실 경제에 대한 우려도 많지만 그에 결코 못지않은 염려가 있다. 바로 외교, 안보 등 시국에 관련된 역사관의 문제이다. 특별히 뉴라이트 운동을 태동시켰던 김진홍 목사의 우려는 그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지난해 6월 25일 오전 이른 시간에 KBS TV에서 때마침 6․25 발발 54주년 기념 특집으로 노근리 사건을 자세히 방영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프로를 보고 난 후에 나의 느낌은 그 당시의 사정을 전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신세대들이 그 프로를 보고 나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이 마치 이 땅에 양민을 학살하러 온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미군 내지 미국과 우리 국민들 간에 이간질을 하려는 그릇된 의도가 있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운동이 ‘뉴 라이트 운동’이다.”(뉴라이트 운동과 국가발전)
그것은 기본적으로 좌파라고 하는 진영의 남북한 및 한미관계를 보는 눈에 대한 강한 반발이다. 뉴라이트의 인식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런 것이 아닐까?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독재의 역사가 비록 정상적이지 못하고 왜곡된 부분이 많지만 대한민국 60년을 온통 실패라고 규정짓는 것은 지독한 자학사관이다. 특히 남한의 독재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북한 일당독재에 맞서기 위한 다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성장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성과를 무시해선 안된다. 더구나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마저 북한이 아닌 미국에게 많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런 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정권을 잡아 반미와 친북의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고 있다.’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기성세대의 그러한 반발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모든 것(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온통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일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이러한 그들의 정서와 분노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건설한 나라인데….’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하게는, ‘어떻게 살아온 세월인데….’
2. 왜 우리는 정당한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뻔한 시시비비조차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국민이 되었다. 그것은 뒤틀려진 역사를 살아오면서 체질화된 우리 안의 큰 상처와 강한 편향성 때문이다. ‘나는 보수이기 때문에’, ‘나는 진보이기 때문에’ 또는 ‘나는 친미이기 때문에’, ‘나는 반미이기 때문에’ 어떤 말은 모르면서도 할 수 있으나 어떤 말은 알아도 절대 할 수 없다. 오직 북한(핵무기, 인권)만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오직 미국(평화, 대북지원)만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분명한 왜곡이다.
1)진보의 조급성과 지나친 편향성은 침묵하던 다수를 적으로 만든다.
사실 지난 100여 년 간 우리 민족은 정상적인 현대사를 살아오지 못했다. 봉건시대가 아직 청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의 철저한 수탈을 받아야 했다. 오랜 수탈을 끝내고 광복이 되었지만 대다수 백성들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체제의 선택을 강요당했다(우리 대다수 백성들은 자유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결코 스스로 체제를 선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남이든 북이든 백성들은 자신들이 강요당한 체제를 처음부터 선택하지도, 수호하겠다고 결의한 적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지난 반백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는 그런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미완의 조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몰려진 모든 시절이 다 비상시국이었다.
그러한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역사의 진실을 우리 안에서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이 땅의 진보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구국의 결단들 속에 숨겨진 추악한 권력욕과 역사왜곡들을 찾아내었고, 우리 민족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정도로 알았던 미국도 사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너무 나갔다. 한쪽 극단을 극복하려다 보니 또 다른 극단의 좋은 점들에만 너무 서둘러, 깊이 천착했던 것이 사실이다. 80년대 열풍처럼 번진 ‘북한 바로 알기’는 ‘또 다른 왜곡운동’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하자. 전형적인 386세대로서 85학번인 나 역시 대학시절, 심지어 신학대학원 재학시절(90~92년)에도 북한을 이 땅에 실현되어가는 하나님나라 정도로 보고 동경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북한을 단지 또 다른 우리의 조국이라고 보는 데서 넘어가, 우리보다 더 큰 역사적 정당성(정통성)을 갖고 있고, 본받아야할 모델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남쪽 지도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항일경력과 식민지 유산의 청산과정 등을 생각해 볼 때 나는 감히 국가건설의 정당성 면에서는 대한민국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그것이 앞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버린 것은 우리의 편향적 오류다.
한 나라의 정당성은 결코 건국과정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북한의 지난 반백년은 사회주의 조국건설이라는 구호 아래 자유와 인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체제를 세습했으며, 무엇보다 백성들을 헐벗고 굶주림으로 뒹굴게 한 역사였다. 이것은 건국과정의 상대적 정당성을 다 까먹고도 남을만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남한의 독재는 지도자들의 욕심이요, 북한독재는 체재수호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 체제가 어떤 모습이든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고 절대 망한다.’는 철칙을 나는 믿는다.
2004년을 기점으로 우리사회 분위기가 개혁에서 보수로 점점 무게중심이 옮겨가게 된 데에는 우리 사회의 상대적 진보세력들의 조급성에 큰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04년 정부․여당은 이른바 4대 개혁법안을 한 세트로 묶어 연말 안에 모두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개폐,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개정안, 언론개혁법안 입안 등 각 사안 모두가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겨우 5년 임기의 자신들이 마치 대한민국 60년을 다 책임지겠다는 만용을 부리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특별히 그 논의의 중심에 국가보안법이 있는 것에 나는 아직도 아쉬움을 갖고 있다.
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하고, 결국 폐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그 개폐는 지금 당장 서두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북한에 대한 열린 평가를 갖고 있지 못한 대다수 기성세대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안법 문제가 논의의 중심에 설 때, 약간 불안하지만 개혁성향의 정부라고 생각했던 국민들의 시각이 일순간 좌파, 빨갱이 정권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기성세대의 역사를 섣불리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 결과 그들의 불안심리를 수구 기득권층은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다. 강정구 교수나 맥아더 동상 철거 등도 역시 시대를 너무 뛰어넘어 수구분위기 형성에 일조한 별로 지혜롭지 못한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분단을 빨리 극복하자는 앞선 의식이 있다고 해서, 전쟁으로 인한 숱한 희생자들의 아픈 기억을 너무 쉽게 수구로만 무시해버리면 안된다. 진정한 치유는 조약이나 정치적 협상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다소의 인내와 세월이 있다.
북한 인권문제에 대하여 요즘 진보진영 안에서도 이를 다루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한겨레 선진대안포럼 참조). 미국 등 서방국가들, 그리고 보수단체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북한에 대한 정치적 압박수단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북한인권 문제를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한국사회에서 평화와 인권을 함께 향상시켜왔던 세력들이 이제 와서 평화와 인권이 서로 동반되지 못하는 가치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다만 미국과 보수세력들의 위선적이고 이중적 인권요구가 아닌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인권의 요구가 한반도 평화와 북한의 발전단계 등을 고려해 지금부터 강구되고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2)반북 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보수운동은 21세기 판 올드라이트다.
앞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상대적 진보세력들의 성급함과 철저하지 못함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수회귀, 냉전고수의 명분으로 삼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무엇보다 뉴라이트가 올드라이트를 극복하려 한다면 반북 이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스스로도 평가하듯이 이른바 진보세력의 역사관에 대한 의식적인 반발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같은 우리의 역사인식은 …현 정권의 좌편향적 역사인식의 대척점에 있다.”(왜 뉴라이트인가?)
그러다 보니 뉴라이트는 또다시 우리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해야 할 처지에 빠졌다. 나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역사를 부끄러워할 수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으나 객관적 평가에 있어서는 그저 역사로 바라보면 좋겠다. 우리 역사를 전체적으로 ‘부끄럽다’하면 자칫 긍정적인 부분까지 놓쳐버릴 수 있는 반면, ‘자랑스럽다’라고 선언하면 부정적인 부분들까지도 억지로 변명하게 되고 만다. 뉴라이트 및 요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쓰자는 분들은 후자의 오류에 자주 빠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하면 일제청산이 미진한 부분도, 이승만대통령이 당시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반공권위주의 정부의 씨앗을 심은 것도, 잇따른 군부정권들이 경제발전을 내세워 정권안보에 나섰던 역사들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업적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역사는 부끄러워할 대상도, 자랑스러워할 대상도 아니다. 좋든 싫든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여정이기에 오늘에 비추어 올바로 극복하려고 할 뿐이지 자랑스럽다고 해서 지금도 여전히 흉내 내려고 해서도, 부끄럽다고 해서 온통 없애버리려고 해서도 안된다.
특별히 아무리 변명해도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이승만의 죄악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반면 뉴 라이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단정노선은 해방정국의 흐름과 국제정세의 냉엄한 현실을 반영한 현실주의적 선택이었다고 긍정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현실주의적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도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아울러 분단은 냉전의 세계사적 전개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만 객관적 고찰이 가능하다고 이해한다. …아울러 1948년 유엔감시 하에 압도적 다수 국민들이 참여한 민주적 선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은 건국되었고, 거기에는 그 어떤 정통성의 하자도 없다고 평가한다.”(왜 뉴라이트인가?)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이승만을 살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왜곡이다. 이북에 권위주의 정부가 섰다는 것이 이남에 권위주의적 매판세력이 정권을 잡아야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당시 김구 등 진정한 민족주의자들도 적어도 소련식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견제를 위해서는 이승만이 불가피했다는 논리는 억지다. 이승만은 단지 이후에 있었던 독재자들 가운데 하나 정도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는 함께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갈 수 있는 너무나도 고귀한 민족의 지도자들을 제거해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편향된 역사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에 세워진 모든 권위주의 정부는 모두 이승만이 세운 잘못된 기초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났다(입으로는 모두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지만).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야말로 이미 이루어졌다. 그는 언제나 권력과 대세에 대한 동물적 감각을 갖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달려간 사람이었다. 분단과 냉전에 관한 한 미국이 소련이나 김일성 못지않은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는 바로 미국이 그런 권위주의자, 기회주의자인 이승만에게 정권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미국편에 섰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그런 역사인식은 전형적인 강자주의요, 사대주의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이들의 시대착오적인 변명은 그 절정을 이룬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이 대외 종속의 심화과정 이라고 말하는 이는 이제 없으며, 아직도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줌도 안 되는 친북 좌파 인사들뿐이다.”(왜 뉴라이트인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 순간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의 최소한 절반 이상은 친북 좌파 인사로 불러야 할 것이다.
2003년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우리 국민 대다수는 이라크 전쟁 자체는 지지하지 않지만,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주어진 미국의 압력을 생각한다면 불가피하다고 답했고,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개혁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솔직하게 그렇게 답했다. 또 지금 향후 어떤 여파를 낳을지 꼼꼼한 점검 없이 정신없이 몰아치는 한미 FTA협상이 외교적 수사처럼 동반자 관계 가운데 서로 평등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답하는 국민들이 몇이나 될지 뉴라이트 운동이 스스로 조사해 보라(협상 자체의 찬반 문제가 아니다). 또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 정부가 국내외 제약업계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만든 ‘의약품 워킹그룹(실무회의)’라는 자리에, 오직 미국만이 단순한 실무자들의 의견전달을 넘어 미 대사관을 포함해 미국 정부 관리들이 참석해 여러 차례 압력을 행사해 왔다고 한다. 미국이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식민지’라는 말이 사전적 표현이 아니라 은유적 표현이라는 것만 감안한다면, 시간이 흘러도 미국의 그늘 아래 있어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는 우리들 속 운명적인 사대의식을 ‘정신적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나는 20세기까지의 역사 가운데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상대적인 진보성(이념적 진보성이 아니라 역사발전적 진보성을 말함)을 언제든 인정할 마음이 있다. 그러나 미국을 포함한 세상 그 어떤 세속국가도 정지된 물체가 아니라 생명이며, 어제의 진보성이 오늘의 낙후성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세계적 차원의 냉전이 종식된 90년 대 이후 미국은 견제 받지 않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스스로 세계의 규범이 되려고 한다. 국제정치, 외교, 군사, 경제, 환경, 인권 등 모든 분야에서 자신들이 기준을 만들어 세계에 강요하려 들면서도, 정작 자기들 자신은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런 기준을 무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절의 상대적 진보성과 동맹적 유대만을 내세우며 미국은 언제나 옳고, 우리는 언제까지든 미국의 입장을 추종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더 이상 국민을 설득시킬 수 없다. 내가 올드라이트 극복을 표방한 뉴라이트에 바라는 최소한의 기대는 결코 반미가 아니다. 적어도 미국은 천사의 나라가 아니라 그저 자기 국익에 충실한 세속 국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따라서 미국의 국익과 대한민국의 국익은 언제든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를 포함한 보수우익 인사들은 말로는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용미(用美)요, 실용주의 노선이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언제나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미국의’ 대미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언제나 든든한 친구처럼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데, 철없는 우리만이 동맹을 배신하고 힘들게 해 한다는 식이다.
민족통합(통일) 정책을 보아도 뉴라이트는 기존 보수우익의 주장에서 한 치도 진전된 것을 찾기 어렵다.
“<대북통일 문제>과 관련해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한 대북 통일정책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의 내용은 묻지도 않는 몰체제적 통일 지상주의를 반대한다. 대북지원과 교류는 필요하지만 그것은 북한의 시장경제化와 북한동포의 인권 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일 때만 의미가 있다고 본다. 뉴라이트는 남북관계의 악화를 우려해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수구적 좌파의 이중 논리에 반대한다.”(왜 뉴라이트인가?)
나 역시 통일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묻지 않고 무조건 통일만 하면 다 잘될 것이라는 통일지상주의는 반대한다. 위 글을 보면 뉴라이트는 통일지상주의는 반대하지만, 통일의 한 파트너인 북한과의 폭넓은 협상과 교류는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와 같은 보수우익 운동이 한사코 체제의 일방적 흡수를 언제나 전제하고 있음을 의심받는 이유가 있다. 위 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한 대북 통일정책”, “북한의 시장경제화”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언제나 우리 체제가 북한에까지 그대로 확산되는 것만이 통일이다.
이들은 자주 북한체제의 붕괴나 흡수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지만, 남쪽체제의 모습을 처음부터 양보할 수 없는 목표로 정해놓고 통일하겠다는 것은 그 말이 그 말이다. 결국 이들에게는 남한이면 남한이고, 북한이면 북한이지 제3의 체제란 애초부터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보수우익에서 말하는 북한인권 개선의 주장이 순수한 인권문제 제기가 아니라 체제붕괴 전략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뉴라이트에게서 “북한 주석궁에 국군탱크가 진주해야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다”라고 주장하는 극우파(올드라이트)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의 주장과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밉든 곱든 반백년이 넘는 엄연한 북한정권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끝까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뉴라이트가 올드라이트를 뛰어넘으려면 엄연한 UN 가입국가인 북한을 하나의 국가, 하나의 체제로 인정해야 한다. 뉴라이트의 민족통합 전략과 인권주장이 순수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이 부분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민족통합을 생각해 보면 한쪽체제(의 가치, 모습)만이 전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큰 불행이다. 정치적 통일 이후에도 더 큰 민족갈등, 심지어는 내전까지 염려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정말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다면 나는 부단히 북한스러워지는 남한과 부단히 남한스러워지는 북한의 연습을 통해 진정한 민족화합과 통합을 이루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신도시 개발처럼 압도적인 자본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북한 전역을 장악하는 식의 통일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면 뉴라이트도 우리가 닮아야할 사회주의적 요소가 무엇인지 지금부터 연구하려는 진지함을 권하고 싶다.
모두가 염려하듯이 지금 우리는 시국을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 서로 함께 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원인은 보수와 진보, 양측 모두가 각자 말하기 쉬운 부분만을 말하면서, 서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대목의 글을 끝내면서 내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진보가 북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보수가 미국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뉴라이트든, 뉴레프트든 우리의 운동을 새로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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