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증오의 정치판, 이성적 판단의 실종

- 칼질 한번으로 사라져간 민주주의의 희망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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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aristotal)등록 2006.05.31 10:37


대선에선 노무현이 울고, 지난번 국선에선 박근혜가 울고, 이번엔 전여옥이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달랐다.

오마이 보도에 따르면, 병상에서도 "대전은요?"라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박근혜 대표는 비장한 표정으로 “박근혜 만세”를 외치는 5천의 시민들 앞에서 “여러분들의 염려 덕분에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게 됐다. 지금의 제 심정은 여러 가지 말로 인사를 드리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처지에 있어 죄송하다. 이번 선거에서 박성효 한나라당 후보를 꼭 당선시켜 달라.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부탁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러분들의 선택을 기대하겠다."고 호소했다 한다.

왜 박성효가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라는 지방 자치제 밑에서 지방행정의 장이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부탁이다>라고 하면 된다. <나의 유지(有志)에 따라 달라는 것이다.> 유권자인 국민의 이성적 판단은 온대 간 데 없고, 한 정치인의 감성어린 카리스마와 얼굴만 보이면 그만이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전여옥 의원은 "박 대표에게 길고 긴 흉터를 남긴 지충호라는 사람의 그 날카로운 칼보다 더 피를 철철 흐르게 한 것은 바로 열린우리당 염홍철 대전시장 후보"라며 염 후보 심판론으로 지지를 호소했다고 한다. 아예 이건 선거유세가 아니고 저주를 퍼부어대는 짓이다.

한 유력한 정치가에 대한 배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자신의 뜻을 배신했다고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서 ‘나를 배신한 자를 처벌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판에서 나올 얘기인가?
저주의 굿판에서 나온 얘기를 더 들어 볼 텐가? "촛불로 감았던 눈, 분노와 오열로 닫았던 귀를 열어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 약속을 지키는 한나라당을 지지해 달라."

히틀러도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과 거기에 모인 대중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정치적 수사와 제스처, 연설장의 분위기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우리는 히틀러의 연설 방식을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감성과 눈물에 호소하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정수를 보고 있다. 자라나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기성 정치인들의 이 기괴한 행태를 보면서 무엇을 배울까? 감성과 인간에게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정치판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쓰레기 더미에서도 장미꽃은 피어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온갖 쓰레기들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토사물이 뒤섞여 있다. 그 쓰레기 더미에서도 장미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오염된 잡곡을 먹어치우는 들쥐들은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맹목적으로 순순히 복종하며 따라야 하는 것일까?

한국의 정치적 풍토가 쓰레기 더미와 같고, 한국인의 정치적 습성은 들쥐와 같다고 조롱한 서양인에 대해 우리가 분개할 만큼의 명백한 정당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렇다. 요사이 일어난 몇 가지 사태를 두고 생각해 보자. 어쩌면 우리를 경멸했던 저들의 말이 정확히 맞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날의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저버리게 할 만한 유감스런 사건들이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길거리의 고성과 감성의 정치가 판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비합리적 요인들과 올바르지 않은 비이성적 판단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정치 무대가 들어서 있는 곳이 제대로 된 민주 시민 사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민주 시민 사회에로의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퇴보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세계에 내노라 하는 삼성이란 기업이 있고, 현대 자동차가 있으면 뭐 하는가? 불한당 같은 놈이 휘두른 칼질 한 번에 국민의 합리적 판단의식과 비판적 의식을 한 순간에 빼앗아가는 사회, 이게 정상적인 사회이고 바람직한 사회현상일 수 있을까?

유령정치와 교주정치는 민주주의 적이다.

병상에 누운 한 정치인의 유지(有志)를 받들고, 낮말 밤말을 죄다 듣는 <조중동>이라는 부라퀴 같은 암팡스런 놈의 말 한 마디에 <신공안 정국>이 조성되는 척박한 정치 공간의 땅에서는 자유로운 비판과 건전한 상식이 통할 리 없다.

알만한 정치지도란 분들이 부끄럽게도 눈물 콧물로 호소해 댄다.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쳐 댄다. ‘우리의 마마를 믿어라. 그녀가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녀의 아픈 마음을 누가 달래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고마운 교주님>의 마음을 저토록 아프게 만든 못된 놈들에게는 독재자의 망령의 <저주>가 내려져야 한다’고 설교해 댄다.

야당의 지도자는 이미 대중과 멀리 떨어져 저만치 앉아 있는 신적 존재로 자리 잡아 버렸다. 교주로 모신 집단은 광신적-종교적 정치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이건 광기에 사로잡힌 사이비 종교집단에 가깝다.

이것을 고스란히 생생하게 중계해 대는 <조중동>이란 사이비 언론은 양념으로 겹들인다. 춤을 춰도 장단이 맞아야 하고,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듯이 잘도 어울려 돌아간다.

“지긋지긋한 미움의 정치, 신물나는 증오의 정치, 칼부림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미움의 정치, 증오의 정치, 칼부림의 정치를 더 계속하자며, 감성적 판단과 눈물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신흥 정치 교주가 되어 미처 날뛰고 있다. 대중의 판단을 호도하고 있다.

대전역이 눈물판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을 떠난 대전 발 눈물의 열차가 이젠 전국 방방곡곡으로 떠나 갈 것이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인들은 시종일관 독재 유신 시대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데서나 무단으로 절판, 눈물판을 벌이는 이미지 정치로 되살아났다.

그들은 눈물의 절만 하고 그 어떤 참회의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우리 국민들을 눈물의 노예로 전락하는 들쥐의 습성으로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대중들은 이성적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절과 눈물에 감동해야만 했다.

악어의 눈물보다 못한 그 눈물이 다 말라 비틀어져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정치인들의 한풀이 정치가 되풀이 되고 있다. 한 정치가의 슬픔이 국민의 아픔이고, 대한민국의 슬픔이 되었다. 이를 위반하면 안 된다고 <부탁>아닌 협박성의 경고 메시지까지 내려 보낸다.

언제까지 증오의 정치와 한풀이 정치가 계속될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선거철만 되면 대중 앞에서 다 늙어 쭈그러져 몰골사나운 꼴을 한 정치인들의 구정물보다 못한 눈물을 보아야만 하는가?

이게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제의 본연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건 지방 자치단체의 장으로서의 능력과 경륜을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눈물 교주들의 장단에 춤추고 누가 교주의 유지를 잘 받들어 모시는가에 자치단체장의 능력과 선택이 달려 있을 뿐이다.

시민들은 그저 교주의 눈물에 따라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우리를 받아 주소서. 우리 교주님!>하고 외치면 그만이다.

왜, 무엇 때문에 선거하는가. 차라리 투표를 집어치우고 누가 민중의 눈물샘을 잘 자극하는지를 가르는 경쟁대회를 개최하라. 그래서 눈물샘 많은 악어와 악어새를 정치 지도자로 뽑아라.

2006년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조의 민주주의>가 탄생한 해로 기록되어야만 한다. 4.19혁명도 없고, 광주 민주화 운동도 없고, 6.10 민중항쟁도 없고, 오직 남은 것은 빈 허우대에 빈 껍데기 뿐인 <눈물의 공화국>을 만든 기념일만 있을 뿐이다.

참으로 우리는 한으로 얼룩진 억울한 역사를 살아왔다. 그래서 감성이 풍부하다. 억세고 강한 마음 한 구석엔 감성에 쉽게 녹아 흐르는 눈물이 늘 고여 있다. 이게 우리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 단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에게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지 깨닫도록 제대로 가르쳐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진정으로 고백하며, 반성하기를 바라야만 하는 것일까? 신파조의 노래에 젖어 그저 의미 없는 눈물로 쏟아대며 권력을 달라고 호소하는 저 <추한 모습들>을 언제나 장막에 가둘 수 있을 것인가?

언제나 저 위선으로 가득 찬 복고의 춤을 추는 지역감정이란 눈물샘을 자극하는 저 자들을 영원히 파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름다운 우리의 민주영령들의 성지를 더럽히지 못하게 하는 냉철한 이성에 세워질 역사를 가질 것인가?

우리에게 아작 희망이란 이름이 남아 있는가?

민주주의가 꽃핀 이 땅은 성스런 곳이니, 그대들의 때 묻은 신발을 먼저 벗지 않고는 다시는 한 발도 내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호통칠 수 있는 그 날이 언제일 수 있을 것인가?

또 다시,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 있는가?’라는 절망 어린 넋두리로 세상을 살아 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달라지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고 다시 되돌아 와 우리 앞에 선 정치적 망령들과 눈물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쓰레기 더미에서는 우리가 희망하고 갈구하는 <아름다운 장미>가 성장할 민주적 풍토가 형성될 수 없다. 거기서 기생하려는 사람들은 누가 주인이 돼도 아무렇지도 않을 <들쥐>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 우린 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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