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沸流)의 꿈

<서울 경기 역사기행 18> 인천 문학산성(文鶴山城) 기행

검토 완료

노시경(prolsk)등록 2006.06.02 09:14

문학산 등산계단 ⓒ 노시경

문학산의 능선이 이어지는 곳에는 잘 만들어진 나무계단이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다. 나는 문학산의 능선에 올라서면서 신비한 전설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비류'의 흔적을 찾고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 1 시조 동명성왕 조에 의하면, '주몽이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함을 보고 거기에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중략). 비류수는 현재 중국 요령성 환인(桓仁) 지역을 흐르는 혼강(渾江)으로, 길이 81km의 압록강 지류이다. 주몽은 이 혼강 상류에서 흘러 내려오는 채소 잎들을 보고 비류국을 찾았고, 활쏘기로 재주를 시험하여 이 비류국을 합병시켰다고 한다.

이 '비류'는 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편에 다시 나타난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라 하고, 차자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인 유리(琉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행하였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중략).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중략).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안거할 수 없어서 돌아와 위례를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평안하므로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또 다른 이설로서, '혹은 이르기를,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중략) 드디어 아우(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의하면,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이가 있어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중략) 드디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비류와 백제 건국설에 대한 위의 3가지 내용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김부식이 백제 건국과 관련된 네 가지 이상의 책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어느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중국 역사서에 전하는 백제의 건국시조 구태(仇台)가 비류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도 역시 풀지 못한 백제시조에 관련된 역사적 퍼즐이다.

'비류'는 주몽이 정복했던 비류국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분명 비류는 비류국에서 태어나서, 비류수 주변에서 자랐을 것이다. 비류는 지금의 문학산 아래에 와서 나라를 열었고, 죽기 전까지는 문학산 주변을 다스리는 작은 나라의 왕이었다. 백제 건국 초기의 백제왕은 온조가 아니라 비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손들이 왕위를 잇지 못하였고, 결국은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十濟)'에 흡수 합병되었다. 그리고 온조가 백제국의 시조로 남게 되고, 백제라는 나라 이름이 온조왕 때부터 사용되게 되었다.

문학산 ⓒ 노시경

산에 올라 숨은 그림 찾듯이 산성의 성벽을 찾아나가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이다. 깊은 덤불 속에서 옥수수 알같이 잘 쌓여진 조상들의 이끼 낀 성벽을 찾는 즐거움. 그러나 비류가 백제의 터전을 닦은 이 문학산성은 나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류의 도읍지 문학산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문학산성 터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이고, 무단으로 이 곳에 들어선 자는 법에 의해 처벌한다는 살벌한 문구가 문학산성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그 경고문 안쪽으로 들어서는 군인 아저씨를 따라 들어가고 싶었으나, 이내 아쉬운 발걸음을 능선 쪽으로 돌렸다.

산 정상 주변을 돌로 쌓은 둘레 577m의 테뫼식 석성(石城), 미추홀고성(彌鄒忽古城)은 정상 바로 입구에서 나에게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시설이 있다면, 일년에 며칠이라도 시민들에게 문학산성을 개방할 수는 없을까?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성안에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학산성 안의 안관당(安官堂) 뒷마당에 돌로 쌓은 우물이 비류정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이 우물에서 물이 나오는지는 문학산성에 들어갈 수가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높은 산 정상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일이다. 높은 산 위에 존재하는 우물은 문학산성을 쌓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산성 터 ⓒ 노시경

이 문학산은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에 항거하던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인천광역시사>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부평 계양산성을 근거로 하던 왜군 일부가 인천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에 문학산성을 수리하고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던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 지금의 간석역 앞인 안대평에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문학산 봉수대 밑, 문학산성 동문에서 서북쪽 약 150m 지점에 돌로 벽을 쌓았다는 안관당(安官堂) 터는 왜군의 공격에 문학산성을 끝까지 지킨 김민선 부사를 기리는 사당이었다고 한다.

문학산 능선을 따라 발아래 펼쳐진 인천의 경치를 감상하며 가다 보니 문학 축구 경기장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범선을 형상화한 이 경기장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다. 거대한 축구 경기장은 문학산 능선과 수평을 이뤄서 문학산 경치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다.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예선 포르투갈 전에서 월드컵 승리를 만끽한 곳이니, 이 곳도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산은 산의 높이에 비해 그 뻗친 맥은 상당히 길다. 문학산 서쪽 끝으로 발걸음을 옮겨 문학산 주봉과 연경산 사이 고개인 사모지 고개 위에 섰다. 이 고개 아래로 문학터널이 뚫고 지나가고 있다. 한성백제시대 중국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이 사모지 고개를 넘어 능허대 앞 나루에서 중국행 배를 탔다고 전해지고 있다.

2천년 전에 이 문학산 주변에 터를 잡은 비류의 왕국은 지금 현대인들의 눈앞에 아련한 흔적만을 보여주고 있다. 비류가 세운 왕국은 왕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에 의해 그 역사적 사실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지고 있고, 우리는 우리 역사의 한 축, 백제의 시작을 이 문학산에서 찾을 수 있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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