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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를 부르면 내 눈시울은 나도 모르게 뜨거워져 온다. 노랫말 속에 담겨있는 아픔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난 너무 감상적인 걸까?
어릴 때 아버지한테서 가끔씩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 먹고 호롱불 밑에 빙 둘러앉아서 고개 들이밀고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곤 했다. 그 때는 숨 막히도록 스릴있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는데 그래도 한번씩은 우리 아버지가 그 때 만약 다쳤다면 또는 죽었다면 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 상상 자체가 너무 무서워서 얼른 다른 데로 생각을 돌리곤 했다.
한국전쟁, 역사책 속에서나 존재하는 우리 민족의 아픔. 그러나 아무도 그 아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따뜻한 피와 살을 가진 젊은 꽃들이 무참히 죽어갔는데도 그건 옛날 일이고 남의 일일 뿐이다.
대구에서 안동 쪽으로 가다보면 '다부동'이란 데가 나온다. 5번 국도 변에 하얀 전적비가 우뚝 세워져 있다. 세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산으로 폭 쌓인 다부동은 서부와 북부 경북에서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이 곳을 뺏기면 대구까지는 삽시간에 점령당할 수 있는 그런 요충지였다.
1950년 7월,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될 처지에 놓인 미군은 현 전선 사수명령을 내렸다. 백선엽 국군 1사단장은 고지마다 주검이 쌓이고 시체를 방패삼아 싸우고 또 싸우는 다부동 방어선 모습을 두고
"나는 지옥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다.
전쟁은 모든 것을 다 파괴한다.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고 그래서 더 이상 비참할 수도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지옥이 바로 전쟁터다.
한국전쟁 때 죽은 국군은 어림잡아 10만 명 선이 된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이름모를 산천에서 백골이 되었다. 그 숫자보다 더 많은 수의 인민군도 이 강토 위에 숨을 내려놓았을 거다.
열여덟살 먹은 내 아들을 바라본다. 아직 어리기만 한 철부지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전쟁터에 내몰렸다
전사자 유해를 발굴해 보면 반수 이상이 20대 초반이고 15살에서 19살 까지도 24프로나 된다고 한다. 그들은 학도병이나 의용군의 신분으로 참전했는데 대부분의 유해는 낙동강 방어선을 따라 나왔다고 한다. 낙동강을 두고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 어린 청소년들까지 동원된 것이다.
자식을 낳고 키우다 보니 어떤 일을 보던지 간에 내한테 일어난 일이었다면 하는 맘으로 보게 된다. 가장(家長)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뉴스를 보면 만약 저게 내 일이라면 난 어찌 사나 하는 생각에 몸을 떨게 되고 또 아이들의 아픔은 내 아이들의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 맥락에서 보면 아군도 적군도 다 소중한 아들이고 형제인 것이다.
목이 가늘고 키가 작은 어린 인민군들을 많이 봤다고 안동에 사는 한 할머니는 그러셨다. 발을 끌며 지나가는 패잔병 무리들의 발소리를 밤새 들었다 한다.
"아주마니, 물 좀 주시라요."
힘이 없어서 물 한 모금 달라는 소리도 잘 못하던 어린 그들을 보면 불쌍한 마음만 들었다 한다.
배고픔과 피로에 지친 몸을 끌고 걸어오던 어린 소년병들은 눈알만 하얗게 살아 있었다 한다. 그 소년병들은 다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목이 가늘고 바짝 마른 어린 인민군들, 그들 역시 이름모를 어느 산 속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어머니를, 고향 하늘을 그리며 숨을 거두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노래를 가만히 불러본다.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가는, 죽고 죽이는 전쟁터를 그려본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데 사람이 사람이 아닌 때도 있었던 거다.
평화는 염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평화는 피를 빨아먹고 피어나는 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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