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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월드컵, 왜 누구도 ‘우리 땅 독도’를 말하지 않는가?
-월드컵 관련한 대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나는 지금 오전 다섯시 십 육분 광화문 시청 옆에 있는 4층짜리 PC방에 앉아 일필휘지로 기사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따스하고 안락한 내방, 그리고 어제 들여놓은 꼬마 길고양이 하악의 애교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PC방을 찾은 것은 월드컵이라는 전 세계적인 축구 축제에 관한 씁쓸한 감정과 실망감이 심히 교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월드컵이라는 글로벌한 스포츠 제전에서 상업주의가 판칠 수 밖에 없음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전지구적 자본주의화는 그러한 상업주의의 황폐함과 정신적 빈곤을 화려함으로 포장하고 미화하는 측면 또한 크다.
내가 가장 실망스럽고 또한 유감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나라의 대기업의 월드컵 마케팅 전략이다. 대한민국의 대기업 마케팅 과장 이상급 담당자들은 모두 바보이다. 정말로 바보다. 적어도 월드컵에 돈을 쏟아 부어 자기업의 홍보 및 이미지 개선 효과를 노렸다면, 최소한 그 어떤 기업도 차별화 전략 만큼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난 경영이나 마케팅을 이론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으나 단 한번 읽어본 하드커버의 경영학 원론을 무척 재미나게 정독한 사람이다. 내게 본능적으로 동물적으로 발달된 감각중의 하나가 바로 경영 마인드나 홍보 마케팅, 이미지 전략 등이다. 게다가 나의 풍부한 아이디어는 사례를 들어 근거를 설명하기에 매우 좋은 편.
내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 과장급 이상의 마케팅 담당자, 혹은 스포츠 마케팅 관계자들이 핵심적으로 놓고가는 가치에 관해 나는 ‘우리 땅 독도’에 관한 얘기로 비판의 칼을 들이대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내 부족한 이론만으로도 대기업이 이번 2006 월드컵 관련한 마케팅은 모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마케팅과 광고의 제 1원칙인 ‘차별화’에 절대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제 1원칙을 어기고 하는 마케팅의 맹점은 남들 다하는, 즉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발상과 개나 소나 다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질낮은 아이디어로 광고 비용만 들였지 비용에 대한 극대 효과를 전혀 보지 못했다는 측면이다.
특히, ‘붉은 악마’ 후원을 하는 대기업들과 선수들이나 축구 지도자들을 광고 모델화 시켰던 카드사, 은행, 증권 등의 기업들을 예로 들어 분석해보자. 우선적으로 SK는 돈만 들였지 가장 실패한 마케팅 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내 기준에 의한 것이다.) 후원을 하면서 기대했던 대기업에 대한 선호도 면이나 이미지 상승 효과 면에서 그들은 윤도현 밴드의 ‘락 버전 애국가’를 광고에 사용함으로써 인터넷 상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많은 경우 마케팅은 대부분 네거티브한 입소문 혹은 인터넷 토론을 통해 알려지도록 하는 것이 많다. (영화 마케팅이 바로 대표적 예이다. 최근 개봉했던 ‘청연’은 그러한 과정이 수준높은 내용과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실패를 낳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기업 마케팅의 경우는 문제가 매우 다르다. 한국인의 절대 다수를 마케팅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소재와 아이템이 필수적인데, 이번 월드컵과 축구에 관한 아이템은 공감을 끌어낼 수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차별화가 어렵고 눈에 띄는 이미지 개선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쯤하여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왜 그렇게 똑똑하시고 공부 많이 하시고 돈도 잘 버신다는 당신네 마케팅 담당자들은, 왜 독도에 관하여 침묵하였느냐고.
답은 묻지 않아도 뻔하다. 미국 MBA 유학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마케팅 이론가들의 눈에는 독도라는 소재는 이미 물건너간 진부한 소재로 여겨졌거나, 축구 혹은 월드컵과의 연관을 전혀 짓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일 뿐. 괜히 애국주의와 집단주의 문화를 강조함으로써 논리적으로는 ‘다수에의 호소’라는 오류를 범하는 광고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의니까. 독도 문제야 말로 애국주의나 다수에의 호소라는 오류를 범하지 않더라도 가장 고유하고 오래된, 그러나 항상 신선할 수 있는 소재 인데도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칠성사이다 광고이다. 칠성사이다는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해 광고에 맑은 물 하천에 사이다 캔을 넣은 광고 때문에 환경단체로부터 욕을 먹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청량음료와 맑은 물에 대한 캠페인 이미지로 이어지면서 광고의 이미지는 확대 강화 되었던 것이다. 더 칭찬할 만한 점은, 독도에서 나온 흔한 갈매기 녀석이 대기업 음료 시장의 광고 메인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었다는 것. 괭이 갈매기는 그 대기업으로부터 한 푼의 출연료도 받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광고를 통해 적어도 일본이 독도 도발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독도 문제를 잊지 않고 깨우쳐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캠페인 성 광고의 문제가 계몽성이라면, 그 광고는 보는 이에게 계몽이나 설득의 방식이 아닌 자연의 한 단면을 통해 한일간의 영원한 투쟁사안인 독도에 관한 짤막한 사색 정도는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 이 칠성사이다 광고의 막강한 효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광고는 가장 롱런하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추가적 광고 제작 없이 리플레이 되어도 싫증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회적인 시류나 변화에 영합하지 않는 이미지와 다큐멘터리적인 감성과 호소력있는 아이의 메시지를 통해 차라리 시적이기까지한 정서를 전달하고 있기에 좋은 광고라 꼽힐 수 있다고 보겠다.
다른 대기업 광고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기사의 분량을 제고하여 대략 생략하고, 한가지를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국민 정서에 담긴 ‘냄비 근성’과 싸구려 천민자본주의적 성격의 미디어들이 반성하고 성찰해야할 지점을, 나는 바로 독도 문제와 연관시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독도 문제는 역사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실 그 자체에 관한 문제다. 그러나 역사인식의 부재, 혹은 왜곡이 낳은 심각한 편향은 전세계적으로 동해를 일본해라는 단어를 쓰게 함으로써 동해 전체가 일본에 소유된 바다로 인식케 한다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것이 서구에 널리 퍼진 지도에서 얻어지는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지식’이 ‘상식’이 되고, 그 상식이 ‘사실’이 되는 경우는 이미 우리가 역사에서 얻은 많은 사실들이 대부분은 날조되거나 꾸며졌거나 미화된 것과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감히 제안한다. 나는 문화 게릴라의 마인드로서 뮤지컬 배우와 작가, 기자, 아티스트를 넘나드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한 개인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지만 일부 지각있는 사람들의 생각 정도는 조금 바꾸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다음 스위스 전에는 소모적이고 맹목적이기까지한 ‘승부욕 전쟁’-16강 신화에 목매고 돈을 쳐박는 현상을 이렇게 이름붙여보았다.-은 이제 그만하고,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내에 산적한 문제내에서 월드컵과 연관지어 말할 수 있는 컨셉트와 민중적 역사관의 반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실천의 예는 월드컵 내에서 독도 관련 이벤트를 흥미진진하게 진행시키고 한류관광이나 문화 상품으로 계발할 수 있는 여지를 마케팅을 통해 마련한다거나, 올바로 정정된 영문판 세계지도를 고급스럽게 제작해서 독일 현지에서 그곳에 온 관광객에게 유포될 수 있도록 글로벌한 세계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핵심은, 월드컵의 껍데기인 ‘붉은 색’이나 이미지, 축구공, 혹은 선수들의 땀 속에 내재한 의미에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스포츠맨쉽과 스포츠를 통한 전지구적 교류의 확대 속에 화합과 평화를 이룩하는데 있다는 본래의 축제 제정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로 들리겠으나, 이번 월드컵은 제소자의 TV 시청도 가능케 해준다거나 죄없는 세계 민중들에게 총과 포탄을 겨누고 있는 많은 슬픈 군인들도 잠시 총질을 멈추게 해준다는 측면에서도 단기간으로 볼때 ‘평화와 축복의 시간’인 것이다. 총을 겨누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 순수한 열정과 땀 눈물 만으로도 전세계인이 열광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나는 다음 스위스 전이 기다려진다. 전국적으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독도에 관한 이슈를 알려내고 잘못된 것을 올바로 잡도록 우리가 이 이슈를 리드하게끔, 내가 노력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질 것이고, 어쩌면 그 자체가 나의 월드컵 관전의 즐거움보다 더 큰 행복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혼자만 잘살믄 뭔 재민겨? 라는 식의 제목의 책이 담는 메시지 처럼, ‘혼자만 행복한 것 보다는 만인의 행복을 위해 인류애를 실천하며 살고 싶다’고 말하던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졸업 논문이 새삼 눈물나게 고마운 때다. 잘하는 것은 즐기는 것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한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잘하는 것은 즐기는 것을 이길 수 없고 즐기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이길 수 없다는 말.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응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모두에게 사랑하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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