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 녀석과 좀 알지!

〈비열한 거리〉의 진부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검토 완료

서정순(yoana)등록 2006.07.05 15:50
스물 아홉의 병두는 세미 정장을 멋지게 차려 입은 어엿한 직장인이다. 하지만 세간에선 그를 조직폭력배, 즉 조폭이라 부른다.
〈친구〉를 비롯한 수많은 조폭 영화에서 조폭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피 튀기며 살아가는 제3의 직업군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조폭 역시 평범한 샐러리맨과 다르지 않음을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었던, 일본 거장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를 보았다면, 유하의 〈비열한 거리〉에서 날것 그대로 보여지는 병두의 투쟁적인 삶이 그다지 새로울 건 없다. 병두 역시 여느 샐러리맨처럼 체제 안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며,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것이다.

병두는 사업가로부터 떼인 돈을 받아오기도 하고, 부하직원들 앞에서 ‘식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촌스럽지만 나름의 진정성을 가지고 설교하기도 한다. 그에게 식구란 ‘같이 밥 먹는 입구녕’이다.
중간 레벨로서 예닐곱 명 되는 아랫것들을 거느리고 있는 그이지만 조직의 보스 상철로부터는 좀처럼 인정받지 못한다. 재개발에 들어가는 허름한 아파트를 당장 비워줘야 하고, 홀어머니의 병은 날로 악화되어가며, 동생들 용돈도 챙겨주고 싶은 그에게 보스 상철은 앓는 소리만 해대는 몰인정한 인간이다. 결국 병두는 조직과 공생관계에 있는 황 회장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크나큰 거사를 제안한다. 회장의 골칫덩이인 박 검사를 직접 작업(제거)하는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제 오른팔인 진구와 박 검사를 무사히 제거한 그에게 황 회장은 무한한 신뢰감을 보이고,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는 그는 자신을 의심하는 상철마저 제거해버린다. 능력만 된다면 ‘형님’을 치고 올라가는 것, 이것이 조폭 세계의 생존법칙이다. 흔히 조폭 세계에서 찬란히 빛나는 의리라는 것은 실상 끊임없이 동생들로부터 위협을 받아야 하는 형님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이 아닐까.
그러므로 변칙적인 방법으로(당연하게도 가장 빠른 방법이다!) 보스 상철을 제거하고 1인자가 된 병두를 의리 없는 천하의 불한당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관객은 그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경쟁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이 각박한 인간사회에 내던져진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너, 우리를 말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조폭을 다룬 게 아니라는 확신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병두의 조폭 세계는 곧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며 끊임없이 경쟁하고 타자를 눌러서 이겨야 하는 비정한 인간세계에서의 생존, 그 상투적이고 직설적인 알레고리이다!

언뜻 병두의 승승장구는 그대로 주욱 이어질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조폭 세계의 비정한 먹이사슬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시집을 세 권이나 냈고, 무림에 매혹된 바 있는 이소룡 키드 유하는 특유의 감수성을 주체 못하고 첫사랑 여인을 등장시켜, 남성들의 영원한 환타지인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를 관습화한다. 달리기를 잘했던 여자 아이 현주는 청순한 아가씨로 성장하여 서점 점원이 된다. 그녀는 동창회 모임에서 조덕배의 노래를 깨끗한 목소리로 불러 제끼고, 알고 보니 유부남과 사랑한 적이 있다(도대체 유부남들은 왜 청순한 여자를 가만두지 않는 거야!).

병두는 현주에게 사랑 고백을 하지만 현주는 망설인다. 병두는 “조폭이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하는 사람은 아냐”라고 말하는데 생 거짓말이다. 그도 사람을 칼로 찌르는, 그야말로 상식적인 조폭인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사랑은 뭇 연인들의 밀고 당기는 행태를 닮아가면서 가닥을 잡아간다.
여기에 요주의 인물이 한 명 있다. 사람 좋은 얼굴로 깡패 친구조차도 열렬히 포옹하는 영화감독 민호. 그는 이렇다 할 작품 하나 못 만들고, 영화사 대표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조폭 영화를 만들 심산으로 병두에게 접근하여 날것 그대로의 조폭 생활을 얻어 듣는다. 이 영화로 그는 단박에 스타감독 대열에 들어선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의문에 부쳐진 박 검사 살인사건이 영화에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즉 비가 몹시 쏟아지던 밤, 멜랑콜리한 분위기에 한껏 빠진 병두에게서 박 검사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민호는 비밀을 지키라는 병두의 부탁을 무시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살려냈고, 박 검사 제거를 사주한 황 회장으로선 이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한다. 곧장 황 회장은 비밀을 누설한 병두를 채근하고, 병두는 민호에게 입단속 잘하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하지만 민호는 병두의 경고를 살해위협으로 간주, 형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병두는 민호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정작 살아남는 자는 민호고 죽는 자는 병두다.
이 비열한 세계에서 병두는 믿었던 동생 ‘진구’(진구 똘마니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살아남은 민호는 황 회장과의 관계망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창작의 기생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유하의 페르소나 민호.


이 영화는 사실상 새로울 게 없다.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젊은 가장의 모습과 첫사랑을 위해서라면 조폭생활도 청산할 각오가 되어 있는 순수 청년의 모습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우정까지도 팔아넘기는 냉혈한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영화 감독들이 보여주었던 이러한 클리셰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미덕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민호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감독의 자기반성이다. 절박한 생존의식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비정한 조폭세계에서 나름의 진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창생을, 그 친구의 실존을 상업적으로 소비하는 민호를 그림으로써, 감독은 기생하는 창작자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곧 자기혐오의 시학이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유독 거슬린 장면이 하나 있다. 서점에서 한 남자 고객이 〈검은 꽃〉을 구입한다. 현주는 〈검은 꽃〉을 건네주면서 〈오빠가 돌아왔다〉는 곧 구비해놓겠다고 말한다. 두 소설 책 모두 김영하의 작품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왜 감독이 이런 장난을 쳤을까 조금 의아해했다. 물론 두 사람이 친분이 있다는 건 어느 글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간접광고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장면은 간접광고 이상의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즉 영화 내적인 면에서 줄거리와 캐릭터가 그다지 새롭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외적인 면에서 유하는 자신의 사적인 대인관계를 장난스럽게 드러냄으로써 ‘나는 누구 누구와 아는 사이다’라는 (아, 이 대목을 좀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진부한 사회적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은 별로 대수롭지 않지만, 나 같은 삐딱이에겐 비판할 건수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장면이다. 예컨대 스타들은 곧잘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연인이나 친구를 향해 암호에 가까운 제스처를 취하는데, 이런 천박하고 불필요한 행동에서 오는 역겨움을 <비열한 거리>에서 느껴야 했다는 게 못내 아쉬우면서, 마치 영화 안에 숨겨져 있는 두 사람(유하와 김영하)만의 암호를 알아챈 것만 같은 통쾌함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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