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 메일 보내 온 우리 땅의 길라잡이 '문정건씨'

저승에서 아들을 통하여 안부를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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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원(semanto)등록 2006.07.19 09:17

1998년 3월 어느 날 매화 마을, 검정 중절모를 쓴 아버지 문정건 씨 뒤에 아들 다일은 아버지의 여행길을 자주 함께 하였다. ⓒ 황종원


묵직한 중량감을 느끼게 하였던 부자를 어찌 잊으랴. 그 다일이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버지의 버스 승객이었던 내가 아버지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려주었다며 고맙다고 한다. 저승에 있는 문 씨가 다일의 꿈을 통하여 일러주었는가.

1997-9년에 주간지 <시티라이프>에서 한동안 주말이나, 휴일에 당일이나 무박 2일 여정으로 사람들을 모아 전국을 다녔다.
MBC 라디오 아침 방송에 1주일마다 한 번씩 그는 맛깔스럽게 갈만한 곳을 소개했으니 그의 말만 들어도 그 곳을 가보고 싶었다.

정작 가보면 쓰레기가 넘쳤지만 어찌 그의 잘못일까.
땅과 강과 산을 험하게 대하는 우리 자신의 추태였지.
그는 자신을 그린 맨 <녹색의 사나이>라 했고, TV에도 가끔 나와서 시청자들의 잠자는 방랑벽을 쑤석거렸다.

나는 그가 초창기 알뜰 여행을 할 때부터 그의 버스에 가끔 탔다.
다가오는 풍경마다 이런 전설이, 저기 산허리 돌면 벼랑의 천년송이 역사가 어쩠네 하고 쉴 사이 없었다. 차를 세우고 사람들이 그가 설명한 곳을 달려가면 그 시간에 그는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담았다. 사진과 함께 그의 여행기는 아주 맛깔스러웠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자 휴일 마다 따라 다니던 그와 함께 갈 일이 없었다.
이따금 시티라이프를 보면 알뜰 여행은 없고, 그의 이름도 없었다.
나는 그저 무심하였다.
그 참에 1999년 봄이 왔고, 그의 육성이라도 들어 보고 싶어서 <시티라이프>지의 여행담당 기자에게 나는
“문정건 씨 요새 뭐한대요?"
“돌아가셨습니다."
" 언제…. 무슨 일로….”
가슴이 덜덜하며 놀란다. 숫한 여행을 하는 그라서 무슨 사고라도…
“뇌졸중입니다.”

무심한 세월 속에 죽음도 이리 허무하구나.
가슴이 떨리고, 그냥 슬펐다.
그는 이 땅 구석구석에 농밀한 애정도 함께 사라진 듯.
각 일간지를 뒤져도 그의 사망에 대한 기사가 뜨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도 그는 이미 없었다.
그는 한 때의 메스컴을 타던 유명인사였다. 그런데도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의 글을 찾아서 인터넷을 헤맨다. 허나 그가 글을 쓰던 때는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다.
이럴 때 그는 낡은 나의 수첩에서는 늘 새롭다.

1998년 시티라이프에 있는 글.
= 5월2일(토)~3일(일)·무박2일(324회)
정동진(모래시계 촬영장)과 무릉계곡·정선 송천강 물철쭉 60리 요즘<알뜰여행>은 정동진 말만 나오면 죄인처럼 숨을 죽인다. 불과 6년 전 하루 이용객이 수십 명도 안 되던 간이역을 지금처럼 온 나라에서 몰려드는 숱한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동진의 옛일을 낱낱이 알고 있는 <알뜰여행>과 함께하는 여행은 감회가 다르다.

그때는 고현정 소나무도, 정동진 시비는 물론 없었고 바닷가 철길 가에 놓여 있는 텅 빈 통나무의자 세 개와 거기서 몇 발짝만 옮기면 바로 백사장에 닿는 적막한 바다풍경이, 여행이 진정 무엇인가를 아는 나그네 발길을 잡았었다.

그동안 <알뜰여행>과 함께한 분들이 추억속의 역코스로 꼽는 여러 일정 중 한곳. 거기에 요즘한창 인기 있는 정동진을 포함시켜서 누구나 바닷가를 정처 없이 헤매는 나그네의 여수와 인적 없는 산골짝을 스쳐가는 길손의 허무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게 감동적인 여정을 만들었다.

나는 그의 글을 다시 읽을수록 따뜻한 그의 정신을 다시 느낀다. 그의 여행 안내를 따라 나서던 그 해 봄 마저.
그 해 우리는 한 일행이 되어 그가 안내하는 정동진에 갔다.
모임 터는 청량리역이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정동진까지 가서 역과 바다를 보기로 했다.
다시 떠나는 길손들에게 버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모여 있는 사람에게 문 씨는 이리 오시오 저리 가시오 하고 분주하였다.
곁에는 아들 다일이가 함께 있었다.

지금 이렇게 심한 비가 왔는데 정동진역은 무사할까.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정동진역은 바다가 조용히 숨고르기를 할 때도 마치 바다에 떠있는 역 같았으니까.
정동진을 보고 돌아가면서 그는 버스 속 안내에서 정동진을 자기가 처음 개척했다고 하며 상인들의 상혼에 때 묻은 정동진을 안타까워 하였다.

그는 몇 년 동안 거의 만 명을 그의 차에 태웠다며 보람을 말했다.
밤새 달리는 버스 속에서 그는 기사 옆 보조 의자에서 반짝 잠을 잤다.
그는 마치 철인 같았다. 밤샘 운전을 하는 기사에게 말을 부치며 그는 버스의 안전을 위해 신경을 썼다.
1미터 70 정도의 키에 90키로의 거구인 그는 가끔 그의 가족 모두 - 아내와 딸과 여기 내게 글을 보낸 아들 다일-를 동행하여 그의 차를 자주 타는 사람들은 그의 가족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여로의 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노래자랑을 시켜 다음 번 여행코스 상품이나 시티라이프 1년간의 구독권이나 피자 한 상자를 상품으로 주었다.
음정 박자 엉망이나 소리는 요란하게 큰 내가 나서면
“지금 나이와는 관계없이 상품에 눈이 먼 황 선생께서 '아빠의 청춘'을 부르려 나오셨습니다. "
나는 그 구박을 달게 웃으며 받았다. 또한 상품으로 다음번 여행권도 받았다.
그는 동요합창을 탑승자들 모두에게 시켰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돈 받고 하는 여행안내도 문정건 씨처럼 하여야 한다. 그는 정말 자기 일을 사랑했다.
그러기에 그는 떠났어도 나는 그를 추억한다. 그리워하는 이들이 나만이 있을까. 함께 길을 떠났던 이들에게 '문정건'은 그리운 산야 같은 이름이다. 아들 다일에게 그의 정신은 다시 다일의 세대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리라.

나는 그의 아들에게, 영계의 문정건 씨에게 답장을 보낸다

" 반갑다. 네가 전하는 소식은 마치 아버지의 육성처럼 고맙구나. 다일아. 아버지를 대하듯 아버지 곁에 함께 있던 어린 너를 기억한다. 이제 성년의 나이가 되었구나. 당당하고 당차던 네 어린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처럼 사람들에게 기억 되는 멋진 사나이가 되리라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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