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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 미국 엘에이에서 미스 유니버스 선발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여기에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한국 대표로 참석하는데, 그녀의 비키니 입은 수영복 사진을 두고 말이 많은 모양이다. 뉴스 진행을 맡은 사람이 성의 상품화란 비난을 듣는 미인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KBS 1TV ‘수요기획’(19일)에서 그간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를 통해서 많은 미인을 배출해 온 베네수엘라 <미인 사관학교>를 소개했다. 제작 의도는 인공적인 미인을 양성하는 미인학교를 소개하고, 베네수엘라 미인학교를 집중 취재한 내용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의 끝없는 욕구와 함께 이런 미인 양성 캠프가 여성 상품화를 부채질하고 성을 왜곡시킨다는 비판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학교에 등록한 베네수엘라 여성들은 미인이 되기 위해서 전신 성형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형이 일반화된 현실에서 ‘미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라는 현대적 미인관은 그리 놀라운 것이 못된다.
이렇듯 베네수엘라 여성들이‘미녀의 꿈'에 집착하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사회 경제적 현실 때문이라고 하는 데, 전체 인구의 90%가 빈민층인 베네수엘라에서 '미인'은 곧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자격증이자 기회’라는 것이다.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한 단면이다.
성의 상품화가 왜 나쁜가?
몇 해 전 미스코리아로 선정됐던 분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성의 상품화’가 왜 나쁘냐고 내세우면서,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큼 우리도 이젠 목소리를 내고 당당히 맞서 싸우겠다’고 단단한 각오를 밝힌 바 있었다.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예전만큼 미스코리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으리라. 그 불만의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엔 몸매 자랑하고 얼굴을 널리 알리는 방송을 타야 인기가 올라가고, 광고 좀 여기저기 하다 보면, 연예계로 진출하게 되고, 이름값이 올라야 돈벌이가 더 잘 될 수 있다는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
그들이 맞서 싸우겠다는 대항 세력은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 등 여성단체들로 짐작이 간다. 이들이 획일적 미의 기준을 강요하는 미인대회 공중파 방송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미스 코리아를 비롯한 여인 선발대회라는 게 수영복 입혀놓고 몸매 심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스코리아에 뽑히기 위해 심사위원을 비롯한 관계자들에게 심심치 않게 돈이 흘러 들어갔고, 그 돈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는 것이 사회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미인 선발대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인 선발대회가 <여성, 몸, 성의 상품화>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미인 선발대회에서 미인을 선발하는 ‘아름다움’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알고 보면 화장품과 여성의 파운데이션이나 팔아먹고자 하는 산업 자본가들이 만들어 놓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청교도에 찌든 기독교적 윤리를 주장하는 최고의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 산업자본가들이 수영복, 여성의 속옷 따위를 만들어 내놓고 보니, 그들에겐 그 물건을 팔아먹을 적극적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자니 공개적으로 여성을 벗겨놓고 입혀야 할 터인데,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허울 좋은 명분을 동원해서 빛 좋은 개살구 격으로 만들어 낸 것이 미인선발대회 아니고 뭐냐 하는 주장도 있어 왔다.
미인선발대회는 한낱 허구적인 것이고, 자본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돈벌이 수단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철저하게 남성 본위적 세계로부터 소외받는 과정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지는 것’이란 주장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여기다 성형수술까지 득세하는 현실이니, 이젠 <미인은 만들어지는 것>이란 주장도 나올 만 하다.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미인대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여럿일 수 있는데, 왜 획일화된 한 가지 잣대로만 그 기준을 정하느냐>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이인식 과학칼럼; 미스코리아의 눈물(2004/06/17)>에는 “여성미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평가 기준이 인류에게 본능적으로 주어졌다면, 어느 누구도 여자의 아름다움을 왜곡할 권리가 없다”며 그 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들의 논리를 소개한 바 있다.
요컨대 미인대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능력은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기준은 모든 문화권에 보편적이며 타고난 본능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여성 몸매에 대한 선호도라는 것이다. 몸매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잣대는 허리/엉덩이 비율(WHR), 곧 엉덩이 치수에 대한 허리 치수의 비율이라는 것이다.
여자의 몸무게에 대한 남자의 선호도는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허리/엉덩이 비율에 대한 선호만큼은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인들의 몸무게는 줄어들망정 허리/엉덩이 비율은 예나 지금이나 0.7 안팎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허리/엉덩이 비율에 따른 아름다움의 기준은 영원히 불변한다는 것이고, 남자들은 큰 엉덩이에 허리가 잘록한 모래시계 모양의 여자를 본능적으로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이러한 몸매의 소유자가 생식 능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남자들이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칼럼을 쓰는 분답게 과학자의 실험을 통해서 생후 3개월 된 아기들도 성인들이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얼굴을 더 오래 쳐다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고 지적한다. 결국,
“사람이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능력은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능력은 개인적 심미안이나 개인이 속한 문화권의 기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뇌 안에 들어 있는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인식의 글에 나타난 논리적 오류에 대해서 일일이 대꾸할 생각은 없지만, 단 한 가지만 물어보자. 생후 3개월 된 아기가 허리/엉덩이 비율이 0.7 안팎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본능적인 감각으로 <이 사람은 그 비율이 0.7이군. 그러니 아름다워. 쳐다볼 만 하군>이라고 판단한다는 말인가? 3개월 된 아기가 옷 속에 숨겨진 몸매의 비율을 투시경으로 쳐다보는 신비적이고 직관적 감각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가장 이상적인 여성들의 몸매의 비율이 0.7라고 치자. 만일 그 여자가 그 비율을 순간적으로라도 잃으면, 그녀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라졌다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속성을 <아름다움>이 가지고 있는가?
게다가 허리/엉덩이 비율에 따른 아름다움의 기준은 영원히 불변하고, 또 남자들은 큰 엉덩이에 허리가 잘록한 모래시계 모양의 여자를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하면서, 고작 그 근거라고 제시한 것도 ‘이러한 몸매의 소유자가 생식 능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남자들이 여기기’ 때문이라는 설득력이 약한 빈약한 주장만을 들이밀 뿐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남자들의 생식능력에 대한 우수성에 대한 믿음이 이 비율을 만들었고, 그 비율에 따른 아름다움의 기준이 영원히 불변한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을 뿐이라는 것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이 주장이 기대는 과학적이고 객관적 주장이란 하나도 없다. 단지 <남성의 믿음>에 의한 근거밖에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 허리/엉덩이 비율이 가장 생식능력이 가장 우수하다는 과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비율에 따라 미인을 선발했다고 하면 결국 엉덩이와 허리라는 인체의 특수한 부위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어떤 기준도 아름다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게다가 여성의 아름다움은 결정적으로 <수영복 심사>에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설령 우리가 0.7이라는 비례관계를 인정해준다고 해도, 그 비율이란 것도 문화권에 관계없이 ‘여자들’이 종족을 보존하려는 수단으로 유전적 형질에 기인한 종적으로 타고난 몸매 비율로 보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는가?
그것이 여자들의 아름다움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없는 지는 순전히 남성들의 욕망의 구조에 비추이는 가치 판단적 시각에 의존할 뿐이다.
남성들의 아름다움이 근육질에 있다고 할 때, 남자들이 근육을 발달시키면 여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잘 발달될 수 있도록 타고 났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주장이 아닐까?
그것이 남성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개인의 취향과 한 문화권의 가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이 땅에 들어 온 후와 이전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고, 영화배우 김지미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세대의 기준과 오늘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어졌다는 것만 보아도, 앞으로 얼마든지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반증은 아닐까?
서양의 명화에 나타난 모델들의 분석에서도, 귀족들의 초상의 그림에서도 몸매의 비율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결정해주는 결정적 변수로 보이지 않는다.
여성미에 대한 평가기준이 본능적일 수 있는가?
“여성미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평가 기준이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주어졌다”는 명제는 결코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주장일 수 없다. 그것도 하필 엉덩이/허리 비율에만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이 적용된다고 하면 말이다.
가슴의 크기는 왜 빠지고, 입의 크기는, 손가락의 길이는 왜 그 기준에서 빠지는가? 게다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논쟁에 휘말리기만 하면 그 주장의 논리적 성립근거는 깨어지기 마련이다.
눈이 크면, 코가 크면, 입이 작으면, 가슴이 크면, 엉덩이가 크면 아름다운가? 기능적으로 보면 코의 아름다움은 코의 <기능>을 잘 발휘하기만 하면 아름답다. 가슴은 아이에게 줄 젖을 만드는 그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어우동의 눈이, 또 가슴과 엉덩이가 어떤 일정한 비율로 크다 해서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인체의 아름다움인가? 장애를 가진 신체 기관에 불과한 것이지.
<영혼>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이 조화와 균형,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은 그리스인들이 찾아낸 아름다움의 기준이었다. 그들은 외적인 비율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에다 <영혼>의 조화를 더해서 아름다움을 말했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감각적인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 지혜와 정신의 아름다움에까지 상승시켰다. 바로 여기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민족이 그들이다. 그것을 밀고 나가야 예술적 아름다움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미인이란 처음으로 볼 때는 매우 좋다. 그러나 사흘만 계속 집안에서 상대해 보면 더 보고 싶지 않게 된다”고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말했다. 왜일까? <성이 상품화된 미인들>이 진정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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