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를 바꾸자

'붉은 악마'란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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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훈(twblidys)등록 2006.07.24 16:47
얼마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 대표팀의 서포터스 <붉은 악마>의 개명에 대한 보도를 했다. 그 후 인터넷상에서 찬반으로 갈려 열띤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논쟁은 단지 종교에 국한된 문제로 비쳐졌고, 실제로 기독교와 반기독교의 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건전한 토론은 실종되고 원색적인 비난만 오고가는 추한 꼴을 보이고 말았다. 종교계의 반응과 상관없이 ‘붉은 악마’란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붉은 악마’란 이름 자체가 우리 입장에서는 유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붉은 악마’란 이름의 유래는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 청소년 대표팀은 당초의 예상을 깨고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성인무대에서의 성과는 아니었으나 국제대회에서 그만한 성적을 올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를 ‘4강 신화’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외신 기자들은 한국팀의 선전에 뒤틀린 심기를 나타내며 우리 대표팀을 ‘붉은 악령(Red Furies)’ 등으로 호칭하며 그 성과를 폄하했던 것이다. 이 표현이 국내에 번역되는 과정에서 ‘붉은 악마’로 표기되었으며, 영문으로 보다 일반적인 단어인 ‘Red Devils’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팀에 대한 악평은 축구 강대국들의 축구 변방에 대한 노골적인 우월주의의 한 표현일 뿐인 것이다. 또한 자국팀이 졌다고 상대팀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외국 언론의 유치한 질투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표현의 대상이었던 우리 스스로 이를 인정하고 그 별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때의 성공에 대한 모든 폄하를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신에 그런 식으로 남겨졌다 해서 그것을 마치 한국팀을 나타내는 대명사 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대주의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 기원이 이러할진대 굳이 이 이름을 고집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붉은 악마’란 이름은 1983년 대회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이름이겠으나, 이는 오히려 1983년의 영광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둘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응원단 이름도 ‘붉은 악마’이다. 벨기에 국가대표의 서포터스의 이름 또한 ‘붉은 악마’이다. 애초에 이 이름 자체가 전혀 독창성이 없었다는 얘기다. 맨체스터와 벨기에에서 수십 년 동안 사용하던 이름을 버젓이 쓰는 것은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처럼 기존의 팀들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사용하고 있는 이름을 굳이 사용했다는 것 또한 ‘붉은 악마’란 이름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셋째,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에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만물은 본질에 따라 이름 지어지고, 그 이름은 본질을 대표하게 되고, 비로소 본질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동호인들이 처음 이 이름을 선택한 것은 아마 ‘붉은 악마’란 이름이 공격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란 항상 배척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항상 선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맺음하는 것을 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돼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붉은 악마’란 이름으로 헤쳐 모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스스로 악당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악역을 맡는 것이 멋지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선한’ 축구 강대국이 ‘악한’ 축구 약소국을 물리친다는 결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마’란 이름 자체가 우리 스스로를 영원한 축구 변방으로 모는 것이다.
우리는 2002년에 영광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악마’란 이름을 계속 사용한다면 그것은 2002년을 다시는 오지 않을 ‘신화’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세계인들의 기억 속에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악’이 잠시 승리한 대회로 남을 뿐인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불후의 명시를 남겼다.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것의 이름을 부를 때, 존재는 참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악마’란 이름이 갖는 강한 이미지를 좇을 것이 아니라 항상 선에 의해 심판받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넷째, ‘붉은 악마’란 이름을 계속 사용하자는 측에서는 개명에 대한 부분은 <붉은 악마>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라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 4800만이 ‘붉은 악마’로 통칭되는 상황에서 상당수의 국민들이 그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최소한 고려는 해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특정 종교의 과민반응으로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건전한 문제제기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오히려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필자는 ‘붉은 악마’ 대신 ‘붉은 천사’란 이름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악마’를 대신할 강력하고, 투쟁적인 이름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축구의 전통과 철학을 집약할 이름을 진지하게 생각하길 원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름을 공모하여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일개 응원단체라고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붉은 악마>를 특정 응원단체로 보지 않는다. 비록 국민들은 <붉은 악마>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붉은 악마>를 전 국민이 함께 응원하는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국민들의 우려를 무시하지 말라.
붉은 악마의 이름은 특정 종교의 과민반응이 아니다. 우리는 그 뜻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어떤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인지 바르게 알 필요가 있다. ‘붉은 악마’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 채10년도 지나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붉은 악마>가 새로운 이름으로 한국 대표팀의 대표 응원단체로서의 위상을 계속 지켜나가길 바란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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