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무엇인가?

투기와 투자, 내기와 도박의 본질

검토 완료

김재홍(aristotal)등록 2006.08.28 14:10
그 본질은 <짱구굴림>이다

투기와 투자, 내기와 도박(노름)은 그 의미규정상 불명확한 영역이 남아 있어서 그 경계가 뚜렷하게 그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도박(賭博)은 <화투, 카드놀이, 시합 등과 같이 그 승부가 불확실한 일에 <요행>을 바라고 돈을 거는 일>이다. 즉 <노름>이라는 것이다.

투자는 영어로 investment라고 한다. 자본을 만들어내고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을 권장하고, 이 부를 산출하는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당한 경제 행위로 치부된다.

건전한 경제적 행위의 일종으로 부정과 도덕적 일탈만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받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름(gambling)은 사행심을 조장하고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는 까닭에 정당한 경제적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법적으로도 제약을 받는다.

지난번 억대 내기 골프를 한 사람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재판부는 "상습도박죄가 성립하려면 내기골프가 도박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며 "도박은 화투나 카지노처럼 승패의 결정적인 부분이 <우연>혹은 <요행>에 좌우돼야 하는 데, 운동경기는 경기자의 <기능과 기량>이 지배적으로 승패에 영향을 끼치므로 운동경기인 내기골프는 도박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문제는 요행수나 우연에 좌우되기로는 투자나 투기 그리고 놀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정도는 <우연적 요인>이 개입된다.

주말마다 온 국민의 시선을 한 군데로 모으는 로또 복권은 확률이 860만분의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승인 받은 로또 역시 거의 전적으로 요행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로또 역시 도박의 범주에 속해야만 한다.

배팅(betting)을 하고 돈을 거는 데에, 다만 그 배팅하는 돈의 액수가 작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모아진 엄청난 돈을 몇 사람에게 몰아주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되지 않을 뿐이다.

확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로또의 배팅에 참여하는 것은 <되든가 안 되든가>라는 2/1 확률에 속았기 때문이다. 로또에 당첨되는 그 확률 값은 거의 0에 가까운 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도박이나 노름, 투자, 투기를 하는 것은 그 본질상 <요행>이나 <행운>에 호소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물론 투자에는 합리적 예측이라는 기대효과가 있다고 해도, 그 투자라는 것도 행운이 다가오지 않으면, 즉 <사회적, 혹은 자연적> 불행이 닥쳐오면 배팅효과는 없어지고 만다. 그럼 점에서는 도박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요컨대 도박이든, 투자든, 투기든 다 인간의 허황된 사변(speculation)이 개입된다. 이 말을 쉽게 풀어 얘기하자면 <짱구 굴림>이다. 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 혹은 관념 철학이란 것도 기본적으로 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서 관념론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태와 다른 가능한 사태를 논리적으로 구성해서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일종의 <응원철학>인 셈이다. 자기 팀을 응원하는 경우에 <우리 팀 이겼다>고 응원하면 이건 사변철학의 전형적 예이다.

왜냐면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승패가 다 끝난 상황을 전제로 응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박사의 오류?

논리학에 도박사의 오류(gambler's fallacy)라는 것이 있다. 다른 말로는 도박의 도시인 Monte Carlo를 빗대서 몬테 까를로의 오류라고도 한다.

이 오류는 ‘모든 사건은 앞에서 일어난 사건과 독립되어 있다’라는 수학적 확률 이론의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일어난다. 가령, 동전을 10번 던져 죄다 앞면이 나왔으니, 이제 던질 11번째의 동전은 뒷면이 나올 확률이 더 높다라고 추리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확률 이론에 따르면 앞서 일어난 사건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결국, 도박사의 오류란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개별 사건들이 서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고 잘못 가정함으로써 빠지는 오류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돈을 잃으면서도 점점 돈을 딸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드는 도박사의 심리적 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오류이다. 도박자는 ‘아직도 터지지 않았나, 다음 번에는 터지겠지. 그 때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어’ 라는 이 거짓된 심리적 도피처를 위안 삼아 도박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로또에 당첨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첨될 기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금년 내로 당첨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 믿음은 결코 정확한 수학적 확률 게임이 아니라, 단지 사변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도박이 아닌가?

저 유명한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다운 신앙의 길로 이끌려는 설득을 함축한 논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논증의 본질도 기본적으로 보면 <짱구 굴림>에 기반한 <내기(배팅)>에 있다.

"하나님은 현존(존재)하거나 현존하지 않는다. 가령 당신이 하나님의 현존을 믿고 기독교적 생활을 영위한다고 해보자. 만일 그가 현존한다면 당신은 영원한 축복을 누릴 것이요, 현존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별로 밑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현존을 믿지 않고 기독교적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정령 그가 현존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어떤 것도 밑질 일이 없다. 그러나 그가 현존한다면 당신은 영원한 저주의 고통을 당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현존을 믿고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것이 현명하고 사려 깊은 일이다."

우리가 특정한 배에 타고 있어서 내릴 방도가 없다고 하는 경우에, 반드시 A 이든 Not-A이든 선택해야만 한다고 해보자. A를 선택한 <최악의 결과>가 Not-A를 선택한 <최선의 결과>와 적어도 동일하다면, 혹은 A의 결과가 Not-A의 결과보다 더 크다면, 우리는 A를 선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이 속에 기본적으로 <짱구굴림>이라는 사변적 요소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가령 <내기나 놀음>을 하는 경우에, 배팅을 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득과 실이란 측면에서 동일한 운이 일어난다고 하고, 또 내기에서 내거는 것은 유한한 것이라고 해보자. 당연히 잃을 것은 <유한한 것>이고, 얻을 것은 <무한>하다고 하면, 무한한 것에 확률 상 더 배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파스칼의 내기 논증이다.

그저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으로는 상당히 납득할 만한 <신앙의 권유>라고 생각된다. 까짓 것, 밑져봐야 본전이라면, 보험 들고 사는 셈치고 기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살아가자는 주장인 듯하다.

십일조 열심히 하고, 주일마다 빠지지 말고 교회 출석하라는 것이다. 죽음 후에 올 피안의 세계에 영원한 축복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 데, 왜 믿지 않고 사느냐는 것이다.

이 말에 설득된 <바보가 아닌 현명한 분들>은 노후보장 보험에 드는 셈치고, <사후 보장형 담보>로 당장 교회에 나가 등록하시기를!

지하철에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소리치면서 사색에 잠긴 사람, 책 읽는 사람을 괴롭힐 게 아니라, 파스칼의 내기처럼 이렇게 차분하게 설득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설득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까? 믿을 거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믿지도 않고 교회에 나가지도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이미 하느님이 되어버린 세상에선?

맑스는 종교는 아편이고 인류에게 해롭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파스칼의 내기가 그렇듯, 종교는 하나의 도박과 같은 것으로 현실에서 유한한 것을 내놓음으로서 피안에서의 영원한 구원을 대가로 기다린다. 오늘날의 도박은, 이미 돈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선 현실에 주는 그 마법적 매력이 종교 못지 않은 마약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돈을 종교로 삼는 사람에게는 기대치가 저 세상의 것이라면, 현실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물질적 만족>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 때문에 종교를 거부하고 도박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가 도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삶의 하나의 수단과 방편으로 받아들이는 가치관의 변화를 절실히 요청하는 것이 아닐까?

이게 가능한 말이냐고 묻는다면 단지 ‘그야 개인의 결단에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운동과 제약조건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리석게도 오늘도 다음과 같이 외치는 이 세상의 사기꾼에 속는 것이 아닌가?

“단돈 1000원. 이건 잃어봤자, 푼돈이야. 허나, 당첨만 되면 상상치도 못할 엄청난 무한대의 대가가 따라와, 그러니 어서 로또 사세요. 안 산다고, 당신 바보 아냐. 다들 인생을 <확!> 바꿔보심이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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